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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메일] 시선

한국여성의전화 2013. 11. 8. 13:53

아버지의 이메일 리뷰 - 시선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아버지의 이메일> 스틸컷

 

 술만 먹으면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술이 원수라는 어머니,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맞고 도망나간 언니, 보다 못해 아버지를 밀친 나와 남동생, 맞고 나서도 다음 날 아침은 꼭 차려주어야 도리라고 생각하는 어머니. 누군가에게는 늘 똑같은 레퍼토리의 진부한 가정폭력 일화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혹은 현재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 3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 ‘ 3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홍재희 감독의 <아버지의 이메일>은 그녀의 아버지가 죽기 직전 딸(홍재희 감독)에게 보낸 47편의 이메일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일생을,가족사를 담담하게 그려낸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는 아버지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직접 쓴 이메일과 어머니, 언니, 남동생을 비롯한 일가친척들, 이웃사촌들의 증언을 가감 없이, 함께 전달하는 내러티브 방식을 통해 아버지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 가족 문제를 당사자의 시선과  3의 시선으로 모두 담아내고 있다.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아버지의 이메일> 스틸컷

 

 바로 이 지점에서 홍재희 감독의 탁월함이 드러난다. 엄마와 언니에게서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분노,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가 비친다. 아버지를 회상하며 껄껄 웃기도하고 울기도 하다가 아버지의 폭력, 그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순간 어머니와의 대화는 급격하게 냉각된다. 언니는 아버지에게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다며 애써 아버지를 사소한 존재로 만들고자 시도하지만,카메라 시선을 회피하며 찡그린 얼굴, 짜증 섞인 단호한 말투로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은 먹먹하기만 하다.


김경순(엄마) : 그런 남자하고 산 엄마 인생을 생각하면, 그런 아픈 얘기는 네가 묻어둬도 되지 않느냐 이거야. 난 그냥 그렇게 인정하면서 살았잖아. 여기서 되풀이 하지 마. 가능하면 언니한테도 가슴 아픈 얘기는 하지 않고 갔으면 좋겠어.”

 

 다큐멘터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홍재희 감독은 어머니, 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생전에는 그에 대한 증오만이 가득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그것은 홍재희 감독이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조명하는 계기가 된다. 이는 그녀가 아버지를 매개로 가족의 문제를  3의 시선에서 새롭게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홍재희 : "엄마, 아버지는 성격이 원래 그랬던 걸까, 아니면 아버지가 살았던 환경 때문에 그랬던 걸까?”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자, 그의 인생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와 자신을 앉혀놓고, 다리에 있는 총상을 보여주며 지겹도록 월남한 이야기를 술주정했던 아버지. 어머니를 때리기 전, 오고가는 고함소리에 꼭 들리고는 했던 빨갱이소리. 그는 왜 그렇게 한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사우디로 가려고 했을까?


 아버지가 가족에게 저질렀던 폭력이 아버지의 삶과, 아버지의 삶이 뒤틀린 한국 현대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면서 홍재희 감독은 홍상섭이라는 인간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했던 폭력은 엄마와 언니와 나와 내 동생에게, 심지어는 조카 지우에게까지 응어리를 남겼다. 그것은 아버지가 행한 폭력이었지만 아버지를 매개로 한국 사회가 휘두른 폭력이었다.  3자의 시선에서 보기 시작했을 때에야 가족을 가리고 있던 사회가 보였다. 더 이상 아버지가 휘두른 폭력은 가족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였다.

 

 아버지를 용서한 후에 처음으로 맞이한 아버지의 제삿날, 아버지와 함께 기차타고 황해도 해주에 계시다는 할머니와 고모들을 만나러 가는 꿈을 꾸었다는 홍재희 감독은 어머니와 언니도 아버지 홍상섭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어설픈 화해의 중재를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그것까지도 좋았다. 가정폭력이 남긴 깊은 골과 화해의 가능성, 화해 불가한 현실까지 모두 담아낸 홍재희 감독의 <아버지의 이메일>은 어쩌면 버거울 수 있는 가정폭력이라는 소재를 단연코 입체적으로, 전혀 지치지 않게, 정말 담담히 그려내었다.

 

 


 

 

한국여성의전화 대학생 기자단 2기 김소현(means2123@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