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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메일]용서는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국여성의전화 2013. 11. 11. 03:26

 

[아버지의 이메일]

용서는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아버지의 이메일> 스틸컷

 

  

객관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나의 아버지를 정의해 보자면 대략 이렇다. 전쟁을 겪은 부모님 세대를 위로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이끈 주역이었으며, 근면 성실한 태도로 자녀들을 부족함 없이 부양한 베이비부머 세대. 그러나 개인적이고 감정적으로 그를 바라보면 어느 새 자랑스러운 한국사회의 주역은 미움의 대상으로 바뀐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아버지를 무척 미워했고 사이도 좋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아예 아버지를 망각해 버리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까닭이다. 그의 기일마다 별 수 없이 아버지의 존재를 떠올려야 하긴 했지만 제사가 끝나고 나면 나는 다시 내 기억을 봉쇄해 버렸다. 불편한 마음을 상기하기 싫었고 망각은 여러모로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이런 망각의 늪에서 끌어올린 것이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이다. 딸이 아버지의 죽음 후 그가 보낸 43통의 이메일을 통해 아버지의 인생과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형식의 이 영화에는 내 아버지와 같기도 다르기도 한 또 한 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공부를 하겠다며 이북에서 목숨을 걸고 월남한 이래, 그 한 개인의 인생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파병, 중동건설 붐, 88올림픽, 그리고 재개발 붐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흘러간다. 북한에서 월남한 아버지의 부친이 다섯 번의 재혼을 거듭한 덕분에 아버지는 계모들의 모진 구박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것도 모자라 20대 청년이 된 아버지가 사업에 크게 성공하자 계모는 소송을 냈고 이것은 그의 첫 성공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된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아버지의 이메일> 스틸컷

 

 

베트남 파병에 자원하여 경제적 재기를 꿈꿨으나 때 이른 철수로 실패했고, 사우디에서 일하며 호주로의 이민을 시도하지만 아내 집안으로 인한 연좌제 때문에 그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만다. 이렇듯 계속되는 실패에 낙심한 그는 방에 앉아 세상과의 소통을 포기해 버린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술을 마셨고, 아내와 자식들을 폭행했으며 직업을 갖지 않음으로써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내던진다. 그리고 알콜중독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이렇듯 영화는 한 개인과 국가의 역사를 촘촘히 엮으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 세밀하게 잘 짜인 내러티브 덕분에 영화는 개인과 역사, 가장과 인간 존재, 남자와 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풍부한 결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훌륭한 아버지이기는커녕 지탄받아 마땅한 나쁜 아버지가 분명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인 딸은 물론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보낸 43통의 이메일 때문이다. 그 이메일들은 이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진실, 혹은 속마음을 우리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만드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글로 표현되는 이메일이 아버지라는 곤혹스러운 존재와 직면하는 데에 완충제 역할을 하는데, 거리두기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를 좀 더 객관화 시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점점 감독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메일들을 통해 그가 비록 수십 년간 가족들을 괴롭히는 무능한 가장이었고 가해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 현대사라는 풍랑에 휩쓸려 희망을 거세당한 채 살아야 했던 피해자이기도 함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 역시 아버지의 이메일이 보내 온 화해의 손길을 담담하게 잡아주려 하고 있다.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렇게 바라본다면 조금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 나는 내 깊은 무의식 안으로 구겨 넣었던 아버지를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그랬기에 용서는 기억하기에서 시작된다.”는 영화 속 내레이션은 특히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용서하거나,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안에서 아버지의 부인으로 오랜 시간 고통 받았던 감독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폭행 당한 후 도망치듯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감독의 언니는 말한다. “남의 상처를 들춰서 아프게 하지 말라.”.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하는 그들을 보며 깨닫는다.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우리가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려 하듯 아직 용서나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가족들 역시 존중받아야 함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에서 그녀는 관객들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 누군가에게 받은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싶을 때 과거의 가 아니라 현재의 로 하여금 고통을 준 상대방을 만나게 하라고. 과거의 고통 받은 나 자신은 당연히 상대를 용서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현재의 는 고통을 이겨냈고 그만큼 성장했으니 말이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언제고 상처받던 그 때의 나로 수십 번씩 돌아가던 내게 상당히 깊었던 대목이었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아버지의 이메일> 스틸컷

 

<아버지의 이메일> 속 아버지는 이메일을 통해 남은 가족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지난 날 고통받은 시간에 대해 사과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이해하는 한편 이메일을 통해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리고 얼마간 치유 받는다. 한국의 아버지 담론이 내포하는 무심하고 무능한 많은 아버지들. 그러나 사실은 그들도 영화 속 아버지들처럼 사회의 풍랑 속에서 표류하고 있진 않을까. 용서와 화해를 위해 그를 기억해 보려 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마음의 눈을 크게 떠보리라 다짐한다. 나의 아버지가 언제고 나에게 보냈을지 모를 이메일들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에 답신하기 위해서 

 

 


7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_이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