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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비디오] 한 뷰어의 고백의 방향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9. 25. 12:08

한 뷰어의 고백의 방향

<아버지의 비디오>

스티어 프레드릭

<아버지의 비디오> 스틸컷


다큐멘터리라면서 사적인 전기라면서 홈비디오인 독특한 영화인 <아버지의 비디오>는 올해 여성영화제에서 국내 개봉했다. 미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개봉한 <아버지의 이메일> (2014, 홍재희)과의 유사성 너무나 강해서 네가 나를 바라본다대신 <아버지의 비디오>라는 제목을 짓고, 상영 후에 피움톡톡에서 홍재희 감독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들의 유사하다는 점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문화 사이에서도 힘든데도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뇌졸중을 겪은 후에 영화 감독인 린다 브라운은 아버지의 치료를 다루면서 이에 대해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을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 사망에 대처해야 하면서 나는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정말 알고 있는가자문하게 된다. 이 질문에서부터, 아버지의 어린 시절, 자신의 어린 시절을 탐구하면서 아버지의 성격을, 힘들고 폭력적인 가족관계를, 그리고 아버지가 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사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대답보다도 질문이 너무나 많이 생겼는데, 나는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자문하게 된다. 나는 집을 떠난 지 이미 8년이 되었고 얼굴조차 뵌 지 거의 3년 되었다. 부모의 사망 앞에서 어떤 반응할 건지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이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알고 있어도, 아무리 마음을 준비했다고 생각해도 그 순간이 도면 예상한 대로 느낄 때가 거의 없다.

그런데 영화의 독특한 유형을 살펴보면 질문이 여러 가자 나타나게 된다. 이 영화는 왜 촬영됐을까? 누구를 위해 촬영한 것인가? 분명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이라면 나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의도와 감독의 의도는 동일해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따라서 감독의 의도와 관객의 의도는 탐구해야 할 것이고, 이 욕망들이 어떤 관성이 있는가의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우선 표면적으로 완전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감독의 아버지에 대한 다큐멘터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중요한 정치인이나 유명한 연예인이나 예술가가 아니었다. 미국의 사회적 이슈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처하는 과정이 줄거리라고 할 수 있지만 관심을 끌릴 스펙터클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고 보면서 어떤 시각적 쾌락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이야기로서 관객을 끌릴 요소는 없어 보인다. 관객을 끌기 어려운 이 영화는 재정적인 이유로 촬영하지 않았다면 위 언급한 바대로 사회 혹은 정치 이슈를 다루지 않으니 사회 참여의 동기로 촬영된 영화로 고려하기가 어렵다. 감독의 마음을 알 수 없기는 하지만, 영화에는 어느 순간에 아버지에 사망을 앞에서 영상을 계속 촬영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이 제작의 핵심적인 계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즉 아버지의 삶과 사망을 다루는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은 감독의 독특한 대처하는 방식일 것이다. 감독에게 결과는 중요하기보다, 그리고 어떠한 관객에게 보여주기보다 제작 과정이 더 중요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촬영을 통해서 위로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촬영할 거면 관객이 이 작품을 왜 봤을 것인가? 한 사람의 실제 이야기임을 알면서 인간 드라마를 더 생생하게 느끼고, 사실이기에 더 감동적인 멜로드라마를 찾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한 사람의 주관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가정폭력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하는 관객이 있을 수도 있다. 분명히 관객 중에서 이러한 이유로 <아버지의 비디오>를 택한 사람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계기는 있다. 그것은 내 계기였다. 개인적으로 그 감독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정폭력 경험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보기로 했다. 톡톡을 들으면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을 것 같다. 수십 년 후에도 돌아가는 분노로 폭발하는 말싸움들, 오래된 동거로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완전히 받아드렸던 어머니, 외부에서 이야기하면 절대 안 된다는 공포, 가족과 이야기하면서 잊어버린 (혹은 억누른) 사건을 인식하게 되는 것, 사랑을 표현할 줄도 모르는 것 등 실은 영화를 보면서 너무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 다시 기억시켰고, 해결되지 않은 부분에 다시 살펴보게 했으며 영화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내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 내 상황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질문들이 많아진 뿐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경험일 경우에는 알맞은 자문을 던지는 게 대답을 얻는 것만큼, (혹은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 적절한 질문을 하면 발전이 가능하며 잘못된 질문으로 시작하면 나침반 없이 숲 속에 빠진 것처럼 아무리 걸어봐도 앞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영 후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피움톡톡이 있었는데, 다른 관객의 질문을 들으면서 울음이든 분노든 이 영화는 아주 강한 반응 (기억) 일으켰나 본다. 특히 중심적으로 둘렸던 주제가 하나 있었다 용서였다. 실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비디오>는 용서로 끝나므로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내용을 아버지의 사망에 대처보다도 아버지를 용서하려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사망 전후 가해자 된 아버지가 왜 가해자 되었는지를, 사랑을 왜 표현하지 못했는지를 다루는 영화다. 바꿔서 말하면 사랑을 표현하기를 기대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 속의 어린이를 위로해주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는 관객이 자문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 자기 어머니를 학대하는 부모를 용서해야 하는가? 나왔던 대답들을 살펴보면 주제를 너무나 이분법적으로 정의했던 것 같다. 즉 용서해서 넘어가버리든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아서 계속 원한을 느끼든가. 하지만 원한을 푸는 것과 용서하는 것을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용서를 하지 않아도 가정폭력의 괴로움을 기억 깊은 곳에 밀어놓고 지내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용서에 대한 대화가 나타났을 때 <오늘> (2011, 이정향)이라는 영화는 바로 떠올렸다. 약혼했던 남자가 살해를 당한 후 남아 있는 다혜의 이야기다. 기독교 신자로서 범인을 강요로 용서했으나 진심으로 범인을 용서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겠다는 핑계로 다른 범죄로 사망한 사람의 유족과 인터뷰를 하면서 용서는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그의 친구의 동생인 지민은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이고 지독한 폭력을 당한다. 위선이더라도 다혜는 지민이 아버지를 모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래도 아버지인데라고 한다. 결국 지민이 가족을 완전히 떠나고, 다혜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깨닫고 마음 정말로 준비한다면 미래에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용서의 여러 측면을 깊게 탐구하는 작품인데 <아버지의 비디오>에 적용할 수 있는 테마들이 많다. 우선 두 개의 작품에서 봤듯이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도 (<아버지의 비디오>는 미국 작품이지만 <아버지의 이메일>와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한국 사회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의 효, 혹은 기독교의 용서, 가해자를 빨리 용서하게끔 다양한 압력을 주는 요소가 많으며 기독교자나 아니더라도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특히 미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이 훨씬 더 깊고, 용서의 대한 압력은 그만큼 강할 것이다. 이 것은 <아버지의 비디오>가 용서로 끝나는 이유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용서해서 어떤 마루리를 얻으려고 한 것 같다 다큐멘터리로서, 한 영상 작품으로서 용서는 깨끗한 결말되기도 하며, 시절부터 기대했던 사랑의 표현을 받고, 아버지의 가정 배경을 알면서 용서로 끝나면 아버지의 사망에 대처하기에 도움이 된 것 같다. 당연히 내가 감독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정확히 말할 수도 없고, 실은 주장이라기보다 들은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용서에 대하여 논의했을 때,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왔어야 될 질문이 있다. ‘용서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용서하면 어떤 모습인가?’ 묻는 것이다. 지민에게 던져 있던 질문과 마찬가지로, 가족이라고 해서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건가? 다른 사람을 모든 사람처럼 흥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깊은 사랑까지 느끼면서도 용서하지 않은 것은 모순으로 여기지 않다. 반면 단순히 부모라고 해서 학대를 계속 당하는데도 함께 하는 것인가? 이렇게 효의 이름으로 한 용서는 오히려 잔인한 짓이다. 타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는 것에서 학대를 허락하는 것, 스스로 학대하는 것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멀리 살아서 관계를 거의 끊어서 된 용서란 것은 그 사람과의 화해가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그 사람에 의한 괴로움과 분노는 지우려는 시도다. 말하자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실제적으로 바뀌기보다는 개인의 머리 속에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변하는 뿐이다. 이는 사람 사이의 용서가 아니라 혹자 하는 행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얼마나 가능한지 불확실하다.


<아버지의 비디오> 스틸컷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에 대한 작품들이 너무나 많지만, 생각하면서 공지영의 <우리들이 행복한 시간>이 생각났다. 주인공이 교도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형을 당할 살해범인을 만나 그의 어린 시절에 그의 빈곤, 학대와 방치를 당함, 그의 상당한 고통을 배우면서 가해자인데도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해주고 가해자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한다. 그러나 살인사건과 관련이 없는 제3자인데 유족이었다면 이 과정이 얼마나 위안될 것인지 나에게 의심스럽다. 가해자 말고 피해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 아니라, 그냥 가해자의 불쌍함이 피해자의 상처를 별로 달래지 않단 의미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비디오>의 감독의 아버지의 힘겨운 어린 시절에 대하여 배워가면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가해자가 된 이유를 우리는 제3자로서 이해해줄 수 있지만 아버지와 딸에 관계에서 별 의미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관객의 용서나 이해를 바라는 목표로 촬영했다기보다 자기 자신이 아버지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으로 본다. 하지만 결말을 다시 살펴보면, 아버지의 과거를 배워서 용서했다기보다 사과하고 사랑한다는 마지막 비디오를 찾아서, 즉 기대하는 사랑의 표현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비디오를 찾아서 용서한 게 아닐까 싶다. 아버지의 사망 전에도 감독이 아버지는 자기 어머니와의 냉정하고 폭력적인 관계, 그리고 혼외 출생임과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계기는 아버지의 오래된 고통을 알고 흠이 있어도 인정하는 게 아니라, 드디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용서하는 것이 치료의 첫걸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아직 설득되지 않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용서한다 해도 학대의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를 입은 상태를 받아드릴 수 있을 뿐이다. 상처에 대한 원한을 푸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용서되는 게 아니다. 아버지 자신의 고통을 알게 되어도 그 상처를 지우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대신에 분노에다가 연민이 썩인 기이한 감정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데도 사랑과 증오 그 사이에 어떤, 혹은 사랑과 증오 공존하는 어떤 독특한 감정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서로 낯선 사랑의 표현도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사랑의 표현에 관련해서는 피움톡톡에서 게스트로 오신 홍재희 감독님이 아주 인상적인 말씀을하셨다. 어떻게 해서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서 남자가 될 수 있는지 걱정하기보다 성별 넘어서 소통하는 방법을 먼저 알아가야 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도 한국 사회도 그것이 얼마나 가능할지 나는 의심스럽다. 태아부터도 성별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남성의 소통일 경우에는 감정 표현을, 그리고 특히 슬픔, 외로움, 불안감, 외로움, 자신의 부족을 절대 보여주면 안 된다. 한마디로 약할 때를 표현하면 안 된다. <아버지의 비디오>에서 봤듯이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남성들이 이 금지된 감정들을 남성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괴로움의 표현, 즉 분노와 공격성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성역할이라는 규칙을 다루지 못하면 사회로부터 소외될 처벌을 받는다. 사실 우울증은 여성 주로 겪는 것으로 통계에 나오지만 최근에 심리학자들이 어떤 남성의 공격성은 우울증의 증상을 보게 되면서 남성의 유병률이 비슷하단 사실을 밝히고 있다. 성역할에 비롯된 피해와 차별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며 우리가 페미니스트로서 진정한 양성평등을 실현하려면 사회와 문화는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어떤 피해를 주는지를 탐구하고 개선의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1]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이 피해는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훨씬 더 심각한 게 맞지만, 젠더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남성과 여성이 껶는 문제들은 동전의 양면으로 본다. 그러므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여성도 남성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양성평등을 위해, 양성의 평등한 자유를 위해 함께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내 소중한 친구를 위해, 성차별로 고통에 시달리는 누구나를 위해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아들과 딸을 위해 조금 더 밝은 미래를 열리고자 투쟁하는 것이다.



[1] 반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달리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위해 투쟁하면서 정말로 젠더제도에 비롯된 양성 문제들을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운동이다. 여성인권영화제에서도 사실을 있다 여성 피해자와 남성 피해자를 똑같이 다루는 <헌팅 그라운드> 작년에 사회적으로 기대된 남성다움에 벗어난 남성에 대한 차별을 다루는 <달팽이> 상영하고  토론을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