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뷰어

<막이 내리기 전에>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9. 28. 03:09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각주:1]

― 벨기에/독일 다큐멘터리 <막이 내리기 전에>

 

 

  That's Life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과 나의 사랑을 결정하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를 결정하는 건 뭘까.

  토마스 발너 감독의 다큐멘터리 <막이 내리기 전에>는 ‘가르데니아’라는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는 트랜스젠더와 드랙퀸의 삶을 조명한다. 자신을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자신들의 삶 그 자체로 목소리를 내는, 그들은 존재한다. 사랑받고 버림받고 구타당하고 쫓겨 다니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귀여운 생활을 한다. 무대 아래에는 일상이 있다.

 

 

  잘생기고 아름다운 괴물

  그들은 꽃 같다.

  가르데니아는 치자나무의 학명이다. 치자 꽃은 향이 강해서 그 향기가 멀리까지 전달된다고 한다. 무대 위에 오른 그들은 그 향기처럼, 자신의 모습과 삶과 목소리를 전달한다. 트랜스젠더가 뭘까. 단지 나라는 존재가 상정하고 있는 존재의 정신적, 육체적 성(性)이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단절시켜버리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개별적으로도, 복잡다단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불을 처음 보는 아이가 손을 대려고 하는 것처럼 질문한다. “대체 게이가 뭐죠? 나는 나를 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여성이 뭐죠?” 신선한 질문이네― 라는 식상한 반응 정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질문이고 나름대로 대답을 해보고 싶은,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다.

  “<메멘토>(2000)의 주인공이 ‘시간성’의 자기동일성을 상실했다면, <뷰티 인사이드>의 우진은 자아의 연장인 ‘신체’의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인물이다. 따라서 우진의 자기동일성은 신체가 아닌 내부의 감정과 사고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를 투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은 변함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이예지, 씨네21 리뷰)”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대한 빛나는 사유의 글을 끌어들이기로 한다.

  우리는 달라지지 않지만 달라진다,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른 걸 시도해봤다가 나와 안 맞는다는 걸 느끼는 과정에서 나 자신이 됐다가 되지 못했다가 망쳤다가 다음에는 좀 더 바보 같지 않은 방향으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장정일,「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를 만나기도 한다.

  예순 전후의 거칠 것 없는 그들의 삶은― 나와 관객들에게 영감을 주고 일종의 살아가는 방법,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앞 다투는 언니들처럼 군다.

 

  사랑, 결국 사랑이죠

  나에게 사랑은 ‘왜?’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상대방의 대답을 납득하는 방식으로 사랑이 지속되거나 끝난다. 타인이 대답하는 방식의 나를 내가 충족시킬 수 없을 때, 나는 내가 되지 못하고 적당히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고 내려오는 배우가 된다. 나는 내 연기가 쓸모없었음을 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오고 무대의 막이 내린다. 

  그리고 막이 내리기 전에 뭔가, 바닥을 닦는 노력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타인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타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남의 무대를 자신의 무대로 착각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의 무대를 갖지 못한 사람이다.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의 무대를 평가하는, 난입하는 관객에 그친다.

  나는 무엇보다 차별받는 소수자들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행복이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편견이나 혐오, 차별을 내려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갈 미워하려는 시간에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미움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을 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별로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스스로가 더럽게 느껴지는 때가 오죠. (-) 인생은 똥으로 된 파이고 매일 그걸 조금씩 먹죠.” 나는 그들이 분을 바르고 속눈썹을 붙이고 입술을 칠하고 구두를 신고 표정을 짓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노력으로, 그런 의미의 도구로써 신체의 일부분을 드러낼 때 왜 슬펐을까― 생각해본다. 그 노력들이 쉽게 외면당하기 때문일까. 내가 그들을 너무 쉽게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까. 그들은 이해가 필요한 존재일까.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전혀 슬퍼하는 감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슬퍼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슬프다.

  사실 나는 이 다큐멘터리에 대해서는 글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귀엽고 아름답고 즐거운 그들을 보는 입장인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말을 다 했다― 무대 위에서, 막이 내리기 전에.

 

  막이 내리기 전에, 나는 나를 좀 더 사랑하려고 내가 되려고 노력해야겠다. 나를 결정하지 않는 게 나는 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인생에서 쉴 틈 없이 중경상을 입는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자. 그리고 다른 사람도 다치게 하지 말자.

  가르데니아 무대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이 글을 쓰면서는 사족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 “죽은 다음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박해받는 천민이 되고 싶다. 그들에게 주어진 슬픔이나 천대를 같이 겪으면서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내고 싶다.” 그들에게도 그렇다. 그들이 천민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슬픔이나 고통을 같이 겪고 이겨주고 싶은 것이다.

 

 

 

 

  1. 심규선 노래 제목.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