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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맛본 자유의 공기 <델마와 루이스>

한국여성의전화 2016. 10. 14. 13:29

한번 맛본 자유의 공기

<델마와 루이스>


황진미 영화평론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는 1991년 5월에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그해 칸 영화 폐막작으로 선정되었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가 모두 후보에 올랐다.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수상은 <양들의 침묵>의 조디 포스터에게 돌아갔지만, 그녀들이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한국에서는 1993년 11월에 개봉되었다. 90년대 초 대학과 문화비평계를 중심으로 막 성장하기 시작하던 페미니즘 담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던 여성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에 동일시되어 묘한 해방감에 들떴다. 비디오로 몇 번씩 돌려보면서 감흥을 오래토록 이어나간 이들도 많다. 올해의 여성드라마로 손꼽힐만한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TV로 <델마와 루이스>를 보던 희자(김혜자)는 정아(나문희)에게 말한다. “이 영화는 봐도 봐도 재밌어. 정아야. 우리 델마와 루이스처럼 여행가자. 이 집 팔아서...” 그렇게 말하던 두사람은 실제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가 싶더니, 얼마 가지 못해 사고를 친다. 마치 델마와 루이스처럼. 두 사람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초조함에 시달리면서도 둘의 우정을 더욱 공고히 굳히는데, 이러한 에피소드는 거의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헌정처럼 느껴진다. 드라마로 한번 환기가 되었기 때문인지, 지난 9월 3일에는 <EBS-세계의 명화>에 <델마와 루이스>가 방영되었다. <델마와 루이스>가 어떤 영화인지 모른 채 본 시청자들은 아직 스타가 되기 전 브레드 피트의 풋풋한 모습을 알아보고 놀라워했다. 


<델마와 루이스>는 가부장적 지배질서에 억눌려왔던 평범한 여성들이 우연한 사고로 저항과 해방의 정서에 눈뜨는 성장드라마로, 페미니즘 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영화의 서사적 측면도 굉장히 잘 짜여 있지만, 장르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델마와 루이스>는 주인공인 두 여성의 이름을 딴 버드 무비이자, 광활한 미 대륙을 자동차로 달리는 로드무비이자, 살인과 강도행각을 벌이며 탈주하는 범죄영화이다. 버드 무비, 로드 무비, 범죄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런 장르의 영화들 중 대부분은 남성 주인공들을 내세운 영화였다. 어쩌다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트루 로맨스>처럼 남녀 커플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을 뿐, <델마와 루이스>처럼 여성 주인공들로 이루어진 버디무비이자, 로드무비는 거의 없었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두 여성들이 길을 떠나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남성 캐릭터들은 대단히 기능적으로 사용된다. 두 여성의 남편과 연인, 그리고 길에서 만난 남자들과 그들을 쫓는 경찰 중 입체적으로 묘사된 캐릭터는 없다. 이러한 인물의 구성과 배치도 여성주의적 젠더 뒤집기로 읽힌다. 


1. 그녀는 왜 방아쇠를 당겼는가


델마는 억압적인 남편과 사는 전업주부이다. 그녀의 행동을 통제하는 남편으로 인해 델마는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루이스가 제안한 이틀 동안의 주말여행에 대해서도 델마는 며칠 째 입을 못 떼다가, 결국 부엌에 쪽지를 써놓고 나온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남편에게 쥐어 사는 델마에게 루이스는 “데릴은 네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지배적인 남편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오다 모처럼 떠난 여행인만큼, 델마는 해방감에 들뜬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몇 잔의 술을 마신 델마는 추파를 던지는 남자에게 호의적으로 대한다. 함께 춤을 추던 델마는 술기운이 오르자 밖으로 나온다. 남자는 성관계를 시도하는데, 델마가 거부의사를 밝히자 주먹을 날리며 강간하려 한다.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할지라도, 거부의사를 밝히는 여성에게 강제로 성교하는 것은 엄연한 강간이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성폭행이 일어나기 직전, 이들을 발견한 루이스가 총으로 위협하자 남자는 겨우 델마에게서 떨어진다. 그러나 남자는 사과나 반성 없이 “재미 좀 보려던 것”이라 말하며 두 여자를 모욕한다. 루이스는 “여자가 저렇게 우는 것은 재미가 있어서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총을 쏘아 응징한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루이스는 경찰서로 가지 않고 달아난다. 


루이스가 총을 쏘고 경찰에 가지 않은 것은 그가 겪은 경험과 관련이 있다. 영화는 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루이스가 그와 유사한 성폭행과 경찰에 의한 2차 피해를 겪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그러한 피해의 경험이 얼마나 깊은 분노와 증오로 남았으며, 경찰과 법을 불신하게 되었는지 알게 한다. 루이스는 델마가 남자와 춤추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에, 성폭행을 저기하기 위해 총을 쏘았다는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폭행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 경찰이나 사법부, 그리고 사회적 여론이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일단 도망을 택한 루이스는 애인에게 도주자금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제이디에게 도주 자금을 모두 도둑맞으면서 일이 꼬인다. 애초에 이들은 성폭행의 피해자들이었지만, 그에 대한 분노로 인해 살인범과 강도가 되어 탈주하기에 이른다. 일이 이렇게 커지게 된 건 무엇 때문일까. 만연한 성폭력과 2차 가해가 이들을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2. 그녀는 어떻게 변모하는가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변모를 보이는 인물은 델마이다. 그녀는 남편의 권총을 여행 가방에 넣을 때만해도 징그러운 물건을 집듯 다루었다. 사용법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델마는 “마치 타고 난 것처럼” 능숙하고 침착하게 총을 다룬다. 


델마는 4년 연애 끝에 18살에 남편과 결혼했다. 델마는 평생 다른 남자를 사귀어보지 못했다고 하니, 남편은 델마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남자이다. 하지만 델마와 남편이 그리 다정해보이지 않는다. 델마가 만35세쯤 되었으니, 결혼생활에 진력이 나서였을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영화는 델마와 남편 사이를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회상장면을 넣지 않는다. 대신 현재의 몇 장면으로 남편이 델마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짐작케 한다. 가령 경찰들이 찾아와 그의 집에 전화를 도청하겠다고 하자, 남편은 비용은 누가 대는지 묻는다. 집나간 아내보다 푼돈이 더 걱정인 것이다. 반갑게 전화를 받으라는 경찰의 지시에 따라 남편이 다정하게 전화를 받자, 델마는 대번에 ‘평소 같지 않음’을 눈치 채고 끊는다. 집에 진을 친 경찰들이 TV 드라마를 열중해서 볼 때,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채널을 돌리다 경찰들의 눈총을 받지 채널을 되돌린다. 델마와 있었다면 그는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봤을 것이다. 


그런 남편과 살아오며 유약하고 순진한 소녀처럼 보이던 델마는 어느 순간 확 달라진다. 결정적으로 바뀐 시점은 길에서 만난 제이디와 하룻밤을 자고 난 뒤 부터이다. 제이디가 돈을 훔쳐간 것을 안 루이스가 망연자실해 있을 때 델마는 루이스의 팔을 잡아끌며 나가자고 말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델마는 루이스에게 의존적이었지만, 이후 관계는 차츰 역전된다. 델마는 홀로 강도행각을 벌이고, 경찰을 총으로 위협해 감금하는 일을 주도한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할까. 제이디와의 하룻밤은 앞의 성폭행 미수사건과는 완전히 다른 결을 지닌다. 앞의 사건에서 델마는 수동적인 존재였고,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그 사건 후 델마는 더욱 위축되어 아이처럼 징징대며 루이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등 짜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제이디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달랐다. 델마는 제이디의 잘생긴 외모와 공손한 태도에 반해서 처음부터 호감을 드러낸다. 그를 차에 태워주자고 루이스에게 사정하는 가하면, 제이디가 방으로 찾아와 말을 걸자 반갑게 맞는다. 델마는 제이디와 장난치면서 즐겁게 대화하고, 원하는 순간 흡족한 섹스를 나눈다. 델마가 직업을 묻자 제이디는 “강도”라고 답한다. 델마는 반신반의 했지만, 그 말은 진실이었다. 결국 그는 루이스의 돈까지 훔쳐 달아남으로써 좀도둑임을 증명하지만, 그와의 짧은 진실한 만남은 델마의 자존감을 고양시킨다. 


그와 섹스 한 다음 날 델마는 마치 약이라도 빤 듯 행복감으로 붕 떠 있다. 남편밖에 몰랐던 그가 다른 남자와 맺은 성관계로 인해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이제야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 완전히 딴 세상이더라.”라는 말은 단순한 성적 오르가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상태에서 상대에게 존중을 받으며 대등하게 이루어진 성관계를 통해 델마는 그동안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온전한 자존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루이스는 돈을 잃은 것에 낙담하지만, 델마는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 오히려 루이스를 위로한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깟 돈 내가 뭐든 해서 벌면 될 거 아니야’ 라고. 길을 떠날 때 루이스는 델마에게 “남편이 하는 낚시를 우린들 못할게 뭐냐”고 말했었다. 지금 델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제이디가 한 강도짓을 나라고 못할 게 어디 있나’ 라고. 그는 제이디에게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만난 사람들은 원망의 대상이 아닌 배움의 대상이다. 자아가 확립된 주체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가르침과 교훈을 얻어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아를 확장시킨다. 델마는 강도짓과 경찰감금을 벌인 후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뭔가를 건너왔고, 이대로 살수가 없다고. 그리고 어느 때보다 깨어있는 느낌이라고.  


델마가 검문하던 경찰을 감금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유혹이라도 할 것처럼 살살 웃으며 다가 온 델마는 경찰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그 순간 경찰의 태도가 싹 바뀐다. “마치 나치 군인처럼” 번쩍이는 제복을 뽐내던 경찰은 자신만만하게 그녀를 대했지만, 총을 본 순간 어린애처럼 벌벌 떤다.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총으로 표상되는 남근의 유무에 의해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유조차 운전수와의 만남도 인상적이다. 처음 마주쳤을 때, 친절하게 양보를 하는 듯 굴던 운전수는 여자 둘이 탄 차임을 알자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혀와 손동작으로 성희롱을 해댄다. 두 번째 마주쳤을 때 “내가 폭풍 같은 사랑을 가르쳐줄까?”라고 말하며 희롱한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났을 때 “진지하게 만나자”는 말에 그녀들이 차에서 내리라고 하니, 성관계라도 하게 되는 줄 알고 기대에 부풀어 내린다. 하지만 그녀들이 성희롱을 따지며 사과하라고 말하자, 거부하며 성적인 욕을 해댄다. 그는 사회적으로 마주치는 모든 여성을 자신의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여성이 강한 어조로 잘잘못을 따지고 사과하라 말하자 더욱 폭력적으로 응수하는 흔한 ‘여혐 종자’의 모습을 재현한다. 이미 남성적 권력의 허세와 실상을 알아버린 두 여성은 유조차를 시원하게 폭파시켜 버린다. 




3. 허공에의 질주

명장면으로 꼽히는 영화의 엔딩에 대해 말해보자. 델마와 루이스는 왜 허공에의 질주를 선택했을까. 영화 안의 두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일종의 의아함이다.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은 주 경찰이다. 두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렸으며, 나쁜 남자들에 의해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그는 루이스에게 살인사건에 대해선 혐의를 벗을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러한 회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비록 범죄로 시작된 것이지만, 처음 느낀 자유를 반납하고 이전에 머물렀던 세계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는 까닭이다. 델마는 이렇게 된 걸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흔쾌히 답한다. “네가 성폭행범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내 인생은 어차피 나빠졌을 테고, 지금처럼 재미있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성폭력 피해자로 사회적 비난에 시달리느니, 강도로 살다가 죽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이들이 범죄자로 도주함으로써 인생을 망치게 된 게 아니라, 어차피 망할 인생에서 나름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 경찰과 연방경찰 기동대의 엄청난 추격을 받게 된 이들은 질주를 거듭하다 그랜드 케니언 직전에 멈춰선다. 그리곤 “잡히지는 말자. 계속 가는 거야”라는 델마의 말 한마디에 둘은 웃으며 굳건히 손을 잡고 계곡 아래로 질주한다. 이들의 차가 허공에 머문 채 끝나는 엔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 내내 루이스는 한사코 텍사스에 발을 들이는 걸 거부하였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을 억압하던 공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엔딩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 며칠 동안이었지만, 도망노예의 신분이 되어 광활한 대지의 숭엄한 기운과 자유의 공기를 흡입한 이들은 자신을 억압해 온 지상의 어느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차라리 허공에 머물지언정, 그것이 죽음을 의미할지언정, 그들은 자유민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이되 죽음이 아닌 영화의 엔딩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