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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여성의전화 2017. 9. 23. 01:26

가족, 다 알지는 못하지만


<지구별>, <가을단기방학>, <숨바꼭질>, <못, 함께하는>


정윤하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9월 22일 금요일, CGV압구정 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되는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가 3일째를 맞이했다. 이날 오후 3시 경쟁부문 출품작 <숨바꼭질>, <지구별>, <가을단기방학>, <못, 함께하는> 등 4편의 영화가 연속으로 상영됐다. 이어 김진아(숨바꼭질), 박경은(지구별), 정가영(가을단기방학), 이나연(못, 함께하는) 감독이 참석한 감독과의 대화가 진행됐다. 이주현 씨네21 기자가 사회를 맡았다.




날것의 아이들을 그려낸 영화

네 편의 영화는 엄마와 이별한 이혼 가정의 자녀들을 그린다. 아동에게 ‘엄마 있음’을 정상성으로 요구하는 사회는 이혼가정의 자녀를 소수자로 내몬다. 미디어와 영화산업은 종종 여기에 편승한다. 구김살이 ‘의외로’ 없거나 무조건 있고, 일찍 철이 들거나 비행에 빠지는 표상에 아이들이 멋대로 담겨진다.


<지구별>에 재밌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내내 집에서 말대꾸 한 번 않던 주인공 ‘별이’가 낮잠을 자는 아빠에게 물세례를 내린다. 박경은 감독은 “친언니 같은 친구가 생겼으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생각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떠날 때 자녀들은 주눅이 든다. 그렇지만 매일 주눅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아니어도 아이들이 사랑을 배울 곳이 많다. 한 관객은 “<가을단기방학>의 연주가 친구들과 딱지치고 노는 모습이 참 명랑해 보였다”며 “극단적인 발랄함이나 슬픔이 보이지 않아 좋았다”고 덧붙였다.




가족의 순간은 어렵게만 지나간다

입체적인 주인공이 돋보이는 영화지만 극영화 <숨바꼭질>, <지구별>, <가을단기방학>의 아이들은 어딘가 닮아 있다. 집에서 말수가 유난히 적다. <지구별>의 박경은 감독은 “표현을 최대한 줄였다”며 “사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나. 주인공 ‘별이’가 엔딩 전까지 아빠에게 외치는 대사도 ‘싫은 건 아빠잖아!’ 한 마디뿐”이라고 설명했다. <숨바꼭질> 김진아 감독도 “아내 폭력 현장에서 소은이가 할 수 있는 것도 옷장에 숨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부모와 친구, 자신을 둘러싼 무감각한 세계에 어린 아이가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가을단기방학>의 정가영 감독은 다른 점을 꼽는다. “지금 그 때의 이야기를 풀다 보니 외로움을 깨달았지, 나도 그 시절은 순간순간을 지나보냈다”는 것이다. 제때 풀 수 있었을지 모를 일들이 쌓여 이별이 이루어지듯, 아이들에게도 가족의 순간은 어렵게만 지나간다. <가을단기방학>의 첫 씬이 책상에 엎드린 연주의 무표정인 것도 비슷한 이유다. 정가영 감독은 “연주가 울거나 내놓고 슬퍼하는 장면이 없다. 짜증을 표출하는 정도”라고 말한다. 비슷한 가족사를 가진 친구를 향해 ‘엄마 없다’는 뒷담화가 들려와도, 어느 날 찾아온 아빠의 여자 친구를 마주해도 연주는 짜증이 날 뿐이다. 어떤 괄시와 무심함이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것인지는 한순간에 다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서로를 생각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 <못, 함께하는>의 시간은 좀 더 길다. 영화의 시점은 세 자매가 엄마와 이별하고 6년이 흐른 현재를 가리킨다. 그동안 자매는 각기 다른 곳에서 부지런히 자랐다. 이나연 감독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며 “일 년에 한두 번 만날 때마다 찍어 뒀던 영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지나간 순간을 뒤늦게 떠올린다. 자매는 왕래가 적었던 아빠와 옛 얘기를 풀어나간다. 수 년 간 대면할 생각도 없었던 엄마의 입장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감독은 “선악의 구도보단 각자의 입장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미워하는 입장에서는 엄마가 악인이었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그 입장도 있었음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매는 엄마와 아직 ‘못’ 함께하고 있다. “엄마와, 아빠랑 동생들과, 카페에서 아빠 여자친구와 영화를 한 번씩 봤다”는 감독에게, 씨네21 이주현 진행자가 가족들 반응을 물었을 때였다. 그는 “다들 울었는데, 그냥 밥 먹으러 가자며 어찌저찌 지나갔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관객들 모두가 지나온 유년기를 그린 상영이어서인지, GV가 진행된 한 시간 동안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이런 영화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는 진행자의 응원으로 행사는 마무리됐다. 네 감독 모두 행사 시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앞으로도 모두에게 쉽지 않은 가족을 들여다보는 작품이 많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