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뉴스

벽장을 깨고 나온 세상의 모든 앤지를 위하여

한국여성의전화 2017. 9. 24. 00:06

장을 깨고 나온 세상의 모든 앤지를 위하여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피움톡톡


경은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9월 23일 낮, CGV 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진행 중인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영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가 상영되었다. 상영 후 김현 여성 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진행으로 피움톡톡이 있었다. 게스트로는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대표와 정혜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이 함께했다. ‘불법’ 이민자 신분인 앤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바탕으로, 사람의 존재를 ‘불법’으로 만드는 시대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존재하지만 존재를 삭제당하는 사람들

영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는 미국에서 ‘불법’ 이민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앤지의 이야기이다. 앤지와 앤지의 엄마는 사회보장번호가 없고, ‘불법’이라는 낙인을 받는다. 영화 속에서 앤지는, 사회보장번호를 받지 못하면 운전면허도 딸 수 없고, 취업도 할 수 없으며, 학교에서 아무리 우수한 성적을 받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단지 법의 인정을 받지 못 했다는 이유로, 삶을 구성하는 모든 일상적, 사회적 생활이 그들에게는 불가능하다. 이미 정착해서 몇 년을 살아도 ‘불법’이라는 지위는 그들을 살아 있지 않은 사람으로 만든다.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비빌 자리는 없다고 법은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 같다.

더 이상 뒷걸음질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벼랑에서, 앤지는 계속 싸웠다. 자신과 다른 이민자들을 위해서 조직을 만들고, 전략을 짜고, 끊임없이 소리쳤다. “나는 서류 미비자이고 두렵지 않다”고,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는 생존자이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앤지는 ‘불법’ 이민자라는 그늘에서 나옴으로써,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나누고 모두의 문제를 끌어안았다. 앤지의 목소리는 많은 ‘불법’ 이민자들의 목소리를 끌어냈고, 그들은 함께 싸웠다. “투명인간”처럼 살면서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앤지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피움톡톡은 영화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시작되었다.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대표와 정혜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모두 영화를 영화만으로 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한국의 이주민들이 처한 상황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게스트에 따르면, 앤지가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도 바로 추방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출입국 사무소 앞에서 ‘불법’체류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소리치면 추방될 위험이 높다. 이렇듯 법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구멍도 많다. 복수국적자여서 추방될 위기에 놓였다가도, 출생연도에 따라 그냥 인정을 받기도 했다는 관객의 발언은 그러한 한국의 법체계를 잘 보여주는 듯했다.


이민국에서 태어난 아이의 출생등록 문제 역시 한국이 더 심각하다. 한국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살아도 한국인이 될 수 없다. 부모가 모두 서류 미비자이면 자녀도 서류 미비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제도상에서 아이 아버지의 국적이 무엇인지만을 따지는 것도 문제라고 게스트들은 지적했다.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대표는 한 네팔 여성의 사례를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합법적 체류 자격이 있고 한국에서 태어나서 존재하게 되었어도, 아버지의 국적이 무엇인지가 아이의 존재 가능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정혜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이주 아동 출생등록과 관련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차별받지 않을 수 있도록,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책임이라고 덧붙였다. 두 게스트 모두, 성인이든 아동이든, 이주민들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부정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다.


복잡한 존재의 그물망 속에서


이주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다른 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영화 속에서 앤지는 ‘불법’ 이주민이면서도 여성이고, 성폭력 피해생존자이다. 앤지가 말했듯, 서류 미등록 이민자 중에는 여성, 성 소수자, 노숙자 등 다양한 존재가 있다. 이렇듯 차별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차별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정혜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행동 위원장은, 그런 배경을 두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싶은 대로 살 자유와, 사랑하고 싶은 대로 사랑할 자유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삶이 가능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차별 없는 세상이란, 바로 그런 삶이 가능한 세상이라고 두 게스트 모두 강조했다. 이어서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대표는, 최근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 여성들을 상대로 저지른 폭력과 학대에 대한 사실인정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언급했다. 이러한 사례처럼,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어야 하고, 여성운동이 더 다양한 언어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여전히, 앤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씨름하고 있다.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정책적인 변화까지 끌어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앤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사람과 함께 소리칠 수 있게 되었다. 치열하게 싸워 온 우리는, 늘 출발점에 서 있고 다양한 곳으로 눈을 돌림으로써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영화는 끝났지만, 앤지와 피움톡톡이 들려준 이야기는 다양한 인권에 대한 고민과 소리침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출발점에 선 세상의 모든 앤지들에게 이 영화가 용기가 되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