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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되기 위한 투쟁>

한국여성의전화 2018. 9. 16. 19:25

<나 자신이 되기 위한 투쟁>

현경 한국여성의전화 7기 기자단

“여성의 몸”에서 산다는 것은

2차성징이 시작되고 “여성으로서” 보여지기 시작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나에게 여성으로 보여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꽤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어른들은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성역할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옷을 입을지, 밤길에 어떻게 걸을지 고민해야 했다. 나를 둘러싼 모두가 나의 허술한 행동거지가 ‘성폭력’이나 ‘매’를 불러올 것이라며 ‘저주’했다. 그리고 하루도 끊임없이 보도되는 성범죄 사건과 여성 살해 사건들까지, 그즈음부터 ‘여자의 몸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에게 ‘여성의 몸에서 산다’는 것은,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하며 내 몸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와지리스탄에서 “여성의 몸”에서 산다는 것은

파키스탄의 탈레반 주둔지역인 와지리스탄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스쿼시 선수다. 그는 와지리스탄의 여성에겐 금지된 스쿼시에 몰두한다. 남자인 척하며 비교적 자유롭고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었으나, 뛰어난 실력 때문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주목받음과 동시에 여자인 것이 알려졌고 16살 때 탈레반으로부터 첫 살해 협박을 받는다. 그가 그의 땅에서 안전하게 스쿼시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영화 속에서 마리아가 편안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두 가지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 캐나다와 파키스탄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이다. 그러나 와지리스탄에서 마리아는 시종일관 긴장 속에 놓여 있다. 살해 협박 때문에 간헐적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고 총을 쏘는 방법도 배워야 했다. 그가 잘못한 것은 단지 여성의 몸으로 와지리스탄에서 스쿼시를 기깔나게 잘했다는 것뿐이다. 그는 살해 협박에 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몸과 재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와지리스탄의 부모들은 여자아이들에게 ‘마리아’ 또는 마리아의 정치인 언니인 ‘아예샤’라는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다. 그들이 금기를 깬 덕에, 와지리스탄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여성으로 보여지는 이상, 삶 속에서 긴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저주받은’ 몸을 넘어, 마리아와 아예샤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생과 사를 넘나드는 모습은 전율을 일으킨다. 그들은 여성의 몸에 덧씌워진 온갖 저주와 협박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결국 여성의 몸이 아닌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의 몸으로 살아가려 한다. 공포를 이겨내고 내 몸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싶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그들을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