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리피움

기억과 생존의 사기극을 넘어; [부대 행사 체험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22. 14:32

 

기억과 생존의 사기극 

 

 내가 자궁·난소암으로 병원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은 기억과 생존이 만들어낸 한 편의 사기극이다. 나의 병중 생활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또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중에 나는 생존자로서 사회가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투병생활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 온생존자의 이미지를 그려본다. 그것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그들이 기대하는 무언가는 다름 아닌 긍정과 희망이었다. 긍정과 희망, 단어 자체만 두고 본다면 뭐라 할 수 없이 참 좋은 단어이다. 그럼에도 병과 싸워서 이겨낸사람으로부터 그들이 얻으려는 긍정과 희망은 꽤나 아이러니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통해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나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 서있는 것은 분명 고통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나는 그 과정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 삶의 이야기는 사회 속에서 온전한 기억을 가지지 못한다. 병을 싸워 이겨냈다는 희망찬 부분과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일상으로 돌아와 잘 살고 있다는 긍정적 생존의 부분만이 살아 숨 쉰다. 긍정과 희망의 이름으로 나의 경험은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들을 누락한 채 한 편의 사기극처럼 기억되고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핑크 리본 주식회사Pink Ribbons, Inc. (다큐멘터리, 캐나다, 97, 2011/감독 레아 풀)” 그리고 말은 은유가 아니다A horse is not a metaphor (실험, 미국, 30, 2009/감독 바바라 해머)”를 추천한다.)

 

 이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여성의 경험, 장애인의 경험, 노인의 경험 등등..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은 일반적인 사회가 받아들이기 쉽고 좋은 방식으로 (주로 희망찬 이야기들로) 각색되어 이야기된다. 그렇기에 이 사회에서 슈퍼우먼 신화가 존재할 수 있고, 모든 역경을 뚫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장애인, 모든 것을 달관하고 삶의 끝을 맞이하는 성자 같은 노인과 같은 이미지들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이미지들이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만 존재한다면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러한 이미지들은 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여러 삶에 간섭한다. 슈퍼우먼이 되지 못하는 여성, 삶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장애인,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인. 그들의 삶은 우리 주위에서 좀 더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일상은 일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면되어야 할 실패작으로 여겨진다. 그 대신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방식으로 재편된다. 덕분에 우리 삶의 수많은 이미지들은 실재하는 것처럼 기억되고 생존하면서 한 편의 사기극을 벌일 수 있다.

 

 

 

기억과 생존의 사기극을 넘어 

 

 이곳 제 6회 여성인권영화제 탐정에도 기억과 생존이 모두 존재한다. 긍정과 희망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이야기는 사기극이 아니다. 좋은 것 나쁜 것을 가려 좋은 것을 선택하거나, 생존자들의 감동적이고 긍정적인 기억만이 살아남아 있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리피움이라는 이름가지고 세 층에 걸쳐 진행되는 탐정의 부대행사들을 스윽 살펴보면, 지하 1층은 생존의 공간으로 1층은 기억의 공간으로 그리고 마지막 2층은 긍정과 희망의 공간으로 읽혀진다. 지하 1층은 지금 우리가 생존해가는 현실에 대해 가감 없이 보여준다. 여성비하발언을 한 망언스타들을 전시해놓은 곳에서부터 그 현실에 실망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분노의 주스가게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1층에는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고통의 흔적과 기억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추모와 기억의 공간 속에서 재단되지 않은 그들의 경험을 직면하고 지지하는 움직임들이 살아있다. 한 층을 올라가면 아래 두층을 통해 얻은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온전한 생존을 위해 우리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긍정과 희망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모든 기억이 함께하고 생존자들 또한 패배자와 대비되는 승리자의 모습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위해. 일상의 정치를 이루어가는 작은 움직임이 2층 벽면을 타고 넘실대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대행사는 전혀 의도치 않은 곳에 있었다. 2층의 행사 참여 장소가 너무 구석에 있는 것 같아 아쉬워하며 내려오는 중에 지하 1층 건물 안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했다. 물론 내가 발견한 '부대행사'는 영화제에서 의도적으로 전시해놓은 것이 전혀 아니었다. “몸 짱의 첫걸음은 비만도 알기부터라는 성북구의 비만도 측정기가 여성인권영화제 탐정과 함께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육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뚱뚱한 몸이 정치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팻 바디를 상영하는 여성인권영화제의 의도와 언젠가부터 뚱뚱한 몸이 질병을 가진 몸으로 등치되면서 그것을 막으려는 선 하디 선한성북구의 의도가 너무나 대비되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웃었지만 사실 그것은 고소(苦笑)에 가까웠다.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그 장면,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두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 땅 위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사기극을 연기하며 살아갈지, 조금은 불편하고 거친 난리 통 속에서 나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지. “난리피움가운데 나는 그 장면을 보고 갈림길 위에 섰다.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웹기자단_ 김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