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뚫는 생존자들의 목소리

<침묵을 말하라>


은연지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아내폭력에 관한 통념에 조용히 반기를 들다


1993년 UN이 제정한 ‘여성폭력철폐선언’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이하 여성폭력)을 “공적인 또는 사적인 생활 속에서 일어난 협박, 강요, 임의적인 자유의 박탈을 포함하여 여성에 대한 신체적·성적·심리적 해악이나 고통을 유발하는 또는 유발할 수 있는, 젠더를 기반으로 한 폭력 행위”라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가정에서 여성 배우자에게 행사하는 폭력 또한 여성폭력에 포함된다. 


그러나 사회는 ‘가정은 공적 개입으로부터 보호돼야 한다’는 이유로 아내폭력을 방관해왔다. 피해자들 또한 가정의 유지를 위해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을 체화했다. 방관과 강요된 침묵 속에서 아내폭력은 오랜 기간 계속됐다.


일부 사건이 수면 위에 드러나는 경우, 아내폭력에 무지한 이들은 완전한 자유인의 상황을 가정하고 왜 빨리 도망가지 않았냐고 질책하거나 피해자가 ‘유약하고 무기력한 피해자’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려 든다. 이 상황 속에서 피해자들은 질책으로 입을 상처를 예견하고 입을 다물거나,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침묵하게 된다.


영화 <침묵을 말하라>는 아내폭력을 둘러싼 사회의 침묵과 통념에 조용히 반기를 든다. 영화는 가정 폭력으로부터 생존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들은 남성 배우자로부터 장기간 신체적·심리적 폭력을 당한 피해자이자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배우자를 살해한 살인자다. 영화는 피해를 경험한 이들로부터 폭력의 특수성을 듣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전달한다. 



남편 살해로 내몰린 여성들

 

피해자들은 담담한 어조로 자신들이 남편을 살해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사정을 밝힌다. 이들은 폭력을 행사한 이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남편’이었기에 쉽게 떠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라 벨마는 남편을 사랑했기에 그가 폭력을 행사해도 떠나기 어려웠다. 글렌다는 남편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안타까운 사람’이었기에 그를 홀로 둘 수 없었다. 아이를 제대로 양육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피해자를 붙잡았다. 조앤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왔지만, 거처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도움을 요청할 사회의 제도도 없었다. 인터뷰에 응한 피해자들이 폭력을 경험했던 당시 공권력은 아내폭력의 성격과 심각성에 무지했다.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경찰서장 존 웰터는 90년대 초반까지도 경찰은 가정폭력이 발생한 현장에서 “집안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세요.”라 답했다고 밝혔다.


사회는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을 묵인했다. 그 속에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사회의 침묵 속에서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고, 자신이 살해당할 위험을 직감할 때까지 남편의 폭력을 견뎌야 했다. 출구 없는 폭력 속에서 죽음을 면하기 위해 이들이 택한 것은 남편 살해였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그리고 운동가로


영화 속 아내폭력의 피해자들은 1989년 ‘폭력에 맞서는 여성재소자 모임(Convicted Women against Abuse)’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피해를 공론화하기 시작한다. 피해자들은 폭력의 경험을 털어놓고 다른 이들의 경험을 들으며, 같은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이들에게 ‘내가 경험한 폭력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이들에게 상처를 치유할 힘을 끌어낸다. 이들은 자신을 ‘생존자’로 명명하고 “난 이런 행동을 했지만, 이제는 나아질 거야”를 외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다른 여성들에게 “자신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낼 결정을 내려도 괜찮다”고 외친다.



감독 올리비아 클라우스, 피해생존자 브렌다 클러바인과의 대화




피움톡톡은 감독 올리비아 클라우스 그리고 ‘폭력에 맞서는 여성재소자 모임’의 창시자 브렌다 클러바인과 화상통화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올리비아 감독은 친한 친구의 폭력 피해 경험을 듣고 그녀를 도울 방법을 모색하다 영화를 촬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자신이 영화를 제작할 당시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힘을 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한국에서 상영한 것에 감사를 표했다. 브렌다는 촬영 직전까지 여러 걱정이 들었지만, 촬영의 경험과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힘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었다고 전했다. 


관객들은 폭력의 피해를 직면하고 이겨낸 브렌다에게 여러 조언을 구했다. 한 관객은 자신의 어머니가 아내 폭력의 희생자였지만, 자신이 어머니를 도울 수 없었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브렌다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관객들을 다독였다. 


브렌다는 폭력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많은 관객이 그에게 폭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물었다. 브렌다는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열한 번의 가출을 시도했다. 이 지난한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녀는 “내 안에서 나오는 힘 있는 목소리를 찾았다”고 밝혔다. 또한 브렌다는 “올리비아와 함께한 촬영이 큰 힘이 되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고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폭력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영화 속 아내폭력 피해자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열정은 아내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고정적인 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을 유약한 피해자성에 가두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생존자이자 운동가로 명명한다. 침묵을 뚫고 울리는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영화를 통해 멀리 퍼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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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그 평화는 가짜다


이소연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평화는 누구의 언어인가? 


나는 불과 이틀 전까지 동네에 있는 PC방에서 알바노동을 했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일했던 친구는 야간에 PC방에서 일하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꿀을 빤다는 것이다. 실제로 야간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10시 이후에는 라면도 끓이지 않을뿐더러 자정 넘어서부터는 손님도 적어 한산했다. 고난은 예상하지 못한 일에서 시작됐다. 


손님들이 툭툭 던지는 말과 눈빛에 나의 일터는 성폭력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귓속말로 “향수 뭐 써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 왜 묶었어요? 나는 푸르는 게 좋던데.”라고 외모 지적을 하는 사람까지, 심지어 엊그제에는 취객이 PC방에 들어와 내 손을 더듬으며 “남자 꼬시려고 하지 않아도 남자를 꼬실 수밖에 없는 몸 냄새가 난다”고 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겠다 싶어 그날로 일을 관뒀다. 신고는 못 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그 아저씨가 나에게 보복을 할까 두려워서다.


사장님을 비롯한 남자 알바노동자들은 나의 이야기에 많이 놀란 듯 보였다. 자신들이 보기에 점잖았던 손님들이 여성인 내게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이중성을 그들은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계속되는 성희롱 탓에 나는 일을 관둬야 했건만, 사장님은 “그래도 이만하면 일은 쉽지 않았니?”라고 말했다. 나는 PC방에서의 노동이 전혀 쉽지 않았다. 평화롭지도 않았다. ‘좋은 일터’라는 말은 나의 언어, 즉 여성의 언어가 아니다. ‘평화로운 일터’는 여성의 경험을 기만한다. 세상의 절반인 남성들의 경험을 토대로 구성된 이 말은, 여성이 일터에서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사소하고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일축해버린다. 



반쪽짜리 인권


그 평화는 가짜다. 이 사회가 말하는 평화가 가짜이기 때문에 그 인권은 가짜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 인권은 가짜다>는 세상 절반의 평화를 토대로 쓰인 반쪽짜리 인권의 실체를 고발한다. 영화는 헌법에 규정된 ‘평등할 권리’가 세상의 절반인 남성의 언어로 쓰였다고 말한다. 남성들‘만’ 헌법을 썼다. 여성들은 헌법이 만들어질 당시, 제도적으로 배제되었다. 인간의 평등을 논해야 하는 헌법 자체가 이미 기울어진 성차 위에 세워진 것이다. 지금의 헌법은 ‘남성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세상을 살아갈 권리’인 셈이다. 




반쪽짜리 헌법은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인간 이하의 삶으로 몰아넣는다. 영화 <그 인권은 가짜다>는 구조적으로 평등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은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미국에서는 자동차 사고보다 가정폭력으로 죽는 여성의 수가 더 많다. 미국 대학 내 폭력 범죄 1위는 강간이다. 42만 명의 여성들이 그들의 자녀와 함께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미국의 여성 노동자 셋 중 한 명은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을 겪고 있다. 미국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가정폭력, 성폭력, 그리고 임금차별은 미국 헌법 안에서 여전히 여성과 남성의 권리가 동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영화가 말해주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어떨까? 한국의 인권도 가짜다. 가정보호사건은 2011년 이후로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9489건으로 급증했다. 상해 및 폭행이 전체의 84.4%에 달한다. 성폭력 범죄 역시 10년째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3년에만 2만 6919건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성폭력 범죄의 대부분이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범죄임을 감안하면, 실제 성폭력 범죄는 6배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규직 근로자의 여남 임금격차는 36.6%로 OECD 평균인 15.6%의 두 배를 웃돈다. OECD 최하위다. 한국에서도 여성은 법이 말하는 ‘인간 혹은 시민’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여성의 언어로 고발하기


<그 인권은 가짜다>는 절반의 인권을 우리 모두의 인권으로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의 언어로, 지금의 세상이 남성의 평등과 평화를 위해 짜여 있음을 끊임없이 고발해야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 인권은 가짜다>는 그 자체로 불평등에 대한 고발이자 여성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인권 선언이다. 영화에 출연한 여성 출연진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평등할 권리는 법 안에서 성별 때문에 부정이나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이다. 평등은 평등이어야 한다는 것. 


반쪽에 불과한 평등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투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끝까지 투쟁하자”고 말한다. 나 역시 일상의 투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볼 작정이다. 무엇보다 나는 진술의 힘을 믿는다. 여성의 말로, 여성의 몸짓으로 기록한 반쪽짜리 인권 실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평등이 가짜일 뿐임을 증명한다. 우리의 법과 제도가 겨우 절반의 인권만을 보장하고 있음을 인식할 때, 인권은 새롭게 쓰일 수 있다. 나는 그때까지 끊임없이 외칠 테다. 그 인권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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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그녀들은 오늘도 페달을 밟는다

<난소 싸이코단>


나현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폭력적이다. 정신 차리세요, 모든 남자가 해롭진 않아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꼭 여성혐오에 대항하기 시작한 한국 여성들에게 쏟아진 반응 같다. 지구 반대편도 다를 바 없다. ‘난소 싸이코단’은 미국 엘에이를 중심으로 조직된 유색인종 여성 자전거부대다. 불안정한, 트라우마가 있는, 버림받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함께 자전거를 탄다. 떼를 지어 거리를 점령하고 때로는 소리도 지른다. 처녀막 찢기, 가정폭력근절 주행 등 다양한 모임을 갖는다. 이런 그들을 주요 언론과 SNS 댓글들은 폭력적인 집단으로 묘사했다. 





무엇이 진짜 폭력인가 

그녀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과연 폭력일까. 그것은 표면적인 기술에 불과하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불가능해진다. 난소 싸이코단은 히스패닉 여성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그녀들은 인종과 젠더라는 이중적인 억압 속에서 살아간다. 미국사회에서 유색인종은 곧 이등 시민을 의미한다. 풍요롭지 않은 가정환경과 사회적 안전망도 부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근근이 먹고 살아간다. 학생인 에비는 나날이 오르는 월세를 걱정한다. 이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젠더는 그들의 고통을 가중한다. 그들은 신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 등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젤라는 여자라고 집 안에만 갇혀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했다. 그들을 향한 사회적인 폭력이야말로 난소 싸이코단을 형성한 동력이었다. 난소 싸이코단은 갱이 아니라, 갱의 형식을 차용해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페달을 밟는다는 것은 

영화 속 한 남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치카노(멕시코계 미국인) 운동은 이해하지만, 모여서 자전거를 타는 게 중요한 일인가요?” 유색인종의 시민권을 위해 운동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여성들끼리 자전거를 타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거다. 하지만 난소 싸이코단은 자전거 타기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녀들이 함께 페달을 밟는다는 것은, 연대한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한데 모여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처음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공동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또한 되찾는다는 것이다. 기존의 밤거리는 여성들에겐 안전하지 못한 곳이었으며, 그곳에서 마음껏 자전거를 타는 것은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다. 난소 싸이코단은 함께 활보함으로써 밤거리가 더는 여성들에게 성적이고 신체적인 위협이 아니며, 그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으로 재의미화한다. 난소 싸이코단은 페달을 밟음으로써 서로 연결되고 함께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는다. 


맹세합니다. 난소 싸이코단으로서 페달을 밟으며 살아갈 것이며, 나의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언제나 저항하겠습니다.

 

그들의 운동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에비의 어머니는 자전거나 타는 에비를 못마땅해하며, 초기 멤버 젤라는 딸을 양육하기 위해 활동을 중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소 싸이코단은 오늘도 페달을 밟는다. 그것이 주위에 있는 여성들과 연대하는 길이며, 자신들을 향한 폭력에 저항할 방법이기에. 그들의 선언을 조금 바꿔본다. “맹세합니다.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갈 것이며, 나의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언제나 저항하겠습니다.” 지구 건너편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녀들은 지금-여기의 우리와도 맞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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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좀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노력


<요한나, 얼음 아래에서> <소녀와 곤돌라> <할미쓰>




 원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세 편의 영화에서 눈여겨 볼 것은 그녀들의 빛나는 의지다. "의지라는 것은 여러 개라도 좋고 하나라도 아예 없어도 좋다 (박판식, <슬픔의 기원>)"는 의미에서 빛난다. 다리를 잃을 뻔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앞지르려는 두려움에 맞서는 요한나, 곤돌라 사공이 되고 싶은 베네치아 소녀 카를라와 인생을 That's so good의 자세로 살아가는 체코의 흥부자 할머니들의 무용단 호르니 르호타.


  한 여자가 새하얀 눈밭을 걸어와 톱질을 하고 얼음 위에 문을 만든다. 문고리가 없는, 심연 같은, 어떤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길을 열어놓은 것 같은 문. 그녀의 두려움은 문을 통과하기 전 무뚝뚝한 표정의 문지기 같다. 


  그러나 요한나는 망설임 없이 얼음 아래로 떨어진다. 


  영상을 보고 있으면 나는 다리를 잃은 것과 맞먹는 상처를 받은 사람 같고 어떤 두려움에 맞서야 할 존재처럼 작아진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요한나의 호흡과 호흡의 사이가 길어지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그녀가 숨을 멎지 않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얼음벽에 부딪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좀 더 자발적으로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그녀를 따라 헤엄치는 것이다.


  어떤 냉대, 혐오와 폭력의 경험, 소리가 통하지 않는 닫힌 문, 꽉 막힌 벽으로도 느껴지는 차가운 얼음 아래에는 자유와 두려움이 공존한다. 요한나는 어떻게 두려움에 갇히지 않고 고통을 이겨내고 천천히 적응해나가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유를 지킬 수 있었을까.


  영화를 결정하는 건 분량이 아니다. 이 짧은 영상 속에서 한 여성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극복하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보여준다.




  여성의 등장, 남성이라는 전통의 종말(?)




  방과 후 또래의 남자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여성 곤돌라 사공을 꿈꾸며 관련 기사를 흥미롭게 읽는 카를라는 평범한 여자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꿈을 꾸는 소녀의 눈은 사려 깊고 “가장 깊은 곳에서 능동적 (이장욱)”이다.


  아빠의 곤돌라 위에서 자기 꿈을 리허설 하고 돌아온 카를라는 군말을 하는 아빠에게 곤돌라가 자신의 곤돌라가 될 때를 위해 연습했다고 어떤 억압이나 자기 단속 없이 털어놓는다. 그러나 단지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앙상한 팔’로는 노를 저을 수 없으며 ‘멍청한’ 생각이라고― 마치 어떤 자족적인 열등감처럼, (900년 가까이 이어져온 남성이라는 전통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분노가 되는 순간, 소녀는 앞뒤 없이 폭력을 받아들여야 만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 두려움과 분노는 왜 여성을 과녁으로 놓는가.


  풀죽어 지내던 카를라는 어느 날, 곤돌라를 타고 내리는 곳에서 여성 사공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흔든다. 소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에게 수줍게 인사를 건네면서 연대를 표하고 지지를 보낸다. 그 뒤로 카를라는 용돈을 받을 때마다 작은 상자에 돈을 모으기 시작하는데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


  요한나가 문을 만들었다면, 카를라는 그 문을 열고 닫고 드나들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쥔 사람이다. 열쇠는 잠긴 문을 열 수도 있고 열린 문을 잠글 수도 있다. 연대와 고립 사이에서 소녀는 열쇠를 구멍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싸우는 일을 해야 한다. 마음을 닫고 갇히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통해 함께 이겨내는 여성으로 자란 카를라의 모습이 그려진다.




  혐오도 비하도 아닌 자기를 인정하는 즐거움




  호르니 르호타 무용단은 어느 날 자기들의 공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문제 해결에 나선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연이 한물갔다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무용단 말고 다른 것’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것’ ‘뭔가 새롭고 강렬한 것’에 대해 골몰한다. 그 결과, 발레 선생을 섭외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상연하기로 하는데.


  여성으로 살다 보면 사회적 분위기에 위축될 때가 많다. 위축되는 마음을 언제나 마음대로 조였다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때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은 자기연민도 혐오도 자책도 비하도 아닌 나 자신을 인정하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요소도 그녀들의 유머가 혐오도 비하도 아닌 자기를 인정하는 즐거움에서 나온다는 데에 있다.


  호르니 르호타 무용단은 생애 첫 발레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관객들은 이 영화를 기대하고 봐도 좋을 것이다. 마음이 따뜻해질 것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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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기자단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여성운동가 47,000명이 모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메이커스>


김하영 페미디아

 

<피움 줌인> 섹션의 리뷰를 쓴 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 페미디아는, 여성과 여성주의 여성운동에 관련된 외신을 번역하고, 국내/외 연구를 소개하며, 여성주의적 시선의 비평을 싣는 온라인 여성주의 매체입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 4차 세계여성회의(이후 베이징회의)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여성 인권을 신장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여겨지는 사건이다. 여성차별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서와 구체적인 행동강령에 189개 국가가 서명함으로써 여성인권신장에 대한 국제적 동의를 끌어낸 것도 성과지만 전세계의 여성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사건이라는 의의도 있다. <메이커스>는 옛날 이야기 내지는 전설처럼 느껴지는 베이징회의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열기를 재현해준다.



 

이 성공적인 회의에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서구 언론은 인권이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중국에서 회의가 열리는 모순을 짚어내며 여성회의에 회의적이었고, 중국 정부는 2000년 하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에서 밀린 후였기 때문에 국제행사를 연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여성운동가들은 베이징회의가 여성인권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것을 예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때는 1990년대 초,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원하면 지구 반대편의 여성운동도 샅샅이 살필 수 있지만, 그 당시 여성이 다른 지역에 있는 여성의 상황에 대해 들으려면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어려웠고, 직접 만나는 장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베이징에서 열리는 유엔 공식회의와 동시에 진행되는 세계여성회의 비정부기구(NGO)포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비자와 숙소만 있으면 된다는 소식을 듣고 전세계 여성운동가들은 일제히 뛰어들었다.1995년 가을이 되자 전세계의 여성이 베이징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화이러우에 모였다. 유엔 회의 참가자 1 7천명을 제외하고도 여성 운동가의 숫자는 3만을 거뜬히 넘겨 중국 당국을 당황케 할 정도였다.[1]

 

예상 밖의 숫자에 놀란 중국 정부가 가진 불안은 수준급이었다. 여성운동가들이 에이즈 양성 레즈비언이며 입국하는 날 공항에서 나체로 행진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침대 시트를 준비시켜 유사시에 몸을 덮어버릴 수 있도록 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웃음을 준다. 그런 발상 자체가 우스꽝스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여성주의자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웃통을 까고 시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남성혐오자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공무원들이 어떻게 그 발상에 도달했는지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거의 반정부조직으로 간주한 중국 정부는 여성운동가들을 국민에게서 격리하듯 비정부기구포럼의 장소를 화이러우로 옮겼다.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여성운동가들은 제각기 이슈를 가지고 나와 서로에게 알렸다. 영어를 몰라도 상관이 없었다. 모두가 자국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참여했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있는 영역에서는 알지 못했던 전쟁 강간에 대해서, 할례에 대해서, 일본군위안부여성에 대해서, 인신매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인권이 여성인권이고 여성인권이 인권이라는 것을 이번 번으로 확실히 합시다.


"If there is one message that echoes forth from this conference, let it be that human rights are women's rights and 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 once and for all."

 

아직도 여성인권신장에 대해서 말하면 인권으로 되받아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왜 장애인 인권, 아동인권, 노동자인권, 전반적인 인권을 논하지 않고 여성의 권리만 주장하냐는 것이다. 즉 인류에게는 인권신장이라는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고, 여성인권신장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식의 구분이다. 2002년 선거를 앞둔 개혁당 내에서 성폭력에 대한 비판을 해일 이는데 조개줍기에 비유한 사건을 안다면 이런 구분이 친숙할 것이다. 아직도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고 여성의 요구들은 대의에 묻히는 지금, 20년 전 여성인권이 인권이고 인권이 여성인권임을 못박은 힐러리 클린턴의 연설은 답답한 여성주의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줄 것이다.



 

베이징회의는 국가가 여성을 보는 관점을 바꿨고, 이 때 완성된 베이징행동강령은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여성차별을 공격하는 무기이자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도 길이 멀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회의에서 완강한 반대로 레즈비언의 권리가 성문화되지 못한 것부터 시작해 회의에서 다루지 못한 여성문제들, 새롭게 생겨나는 여성문제들에 대한 세계 각지의 운동가들이 대항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대책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5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것과 그 파급적인 효과는 베이징회의가 앞으로의 여성운동에게 준 희망이다.

 

회의 이후 21년이 지난 지금, 페미니즘은 인터넷을 타고 젊은 세대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다. 2016 한국에서 논의되는 문제는 디지털성범죄, 데이트폭력, 아이돌 성상품화 등 베이징회의에서 논의된 것과는 다른 문제들이다. , 현재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인터넷, 대중문화, 그리고 소비주의와의 결합으로 1995년과는 다른 모습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있고, 그에 따라 대응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의 목소리는 주류가 되지 못하고 현실 차별은 가려지고 있는 상황, 이 속에서 변화를 외치다가 지쳐 막막해질 때면 잠깐 1995년도으로 돌아가 화이러우에 모인 여성운동가들에게서 에너지를 받아오자. 거듭된 방해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이 우리 세대의 페미니스트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1] World Conferences on Women, UN Women, http://www.unwomen.org/en/how-we-work/intergovernmental-support/world-conferences-on-women(확인 날짜201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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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일상의 연단에서 외침을

<폴리티컬 애니멀>


이소연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여성의 일상 곳곳에 억압이 있다. 매일 차고 다니는 브래지어가 대표적이다. 가슴이 쳐지면 어때? 젖꼭지가 보이면 어때? 늘 고민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의 작은 가슴을 들여다볼까, 드러난 젖꼭지를 헐뜯을까 두려워 ‘노브라’로 외출한 적은 없다. 집에서라도 마음 편히 노브라로 지내면 좋으련만 아빠와 함께 살고 있어 노출이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내 몸이 브래지어에 익숙해져 버렸다. 언제쯤 내 몸에 자유가 찾아올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폴리티컬 애니멀 Political animals>은 변화란 바로 나 자신의 외침과 행동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티끌이 모여 태산을 이루듯 작은 외침이 모여 커다란 변화를 만든다. <폴리티컬 애니멀>은 티끌들의 투쟁에 관한 역사다. 영화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이어받은 레즈비언 정치인 네 명의 연대와 투쟁을 기록했다. 그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함께 힘을 합쳐 끊임없이 행동한 결과 성소수자 차별금지법, 시민결합Domestic partner registration, 동성결혼 법제화를 이루어냈다.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이들의 외침이 낸 균열이 쌓이고 쌓여 남성 중심 사회를 조금씩 부술 수 있었다.


“여성이 단두대에 설 수 있다면, 연단에도 설 수 있어야 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참정권을 요구하며 여성의 인권을 외쳤던 올랭프 드 구주는 죽고 없지만, 그녀의 외침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몸짓을 통해 할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한국에서도 여성들의 움직임 덕분에 남성 중심 사회의 맥을 이어오던 호주제를 뿌리 뽑을 수 있었고, 최근에는 ‘강남역 10번 출구’에서의 외침으로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한국 사회에 공기처럼 퍼져 있음을 직면할 수 있었다. 여성의 연대가 남성 중심 사회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가 어딜 감히 나서”라는 구닥다리 생각이 여전히 통용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의 투쟁은 지난한 싸움이 될 테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하기도 하다. 일본의 정치학자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듯, 데모를 함으로써 데모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폴리티컬 애니멀>은 개인들이 모여 변화를 이뤄낸 역사를 비추며,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든 연단이니 그저 말하고 행동하라고 말한다. 더 많은 여성들이 나서고 설칠수록, ‘여성들이 떳떳하게 자신의 몸짓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균열의 시작 아닐까?


그러니 여성들이여, 일상의 연단에서 외치고 행동하자. <폴리티컬 애니멀>의 주인공 실라 쿠셀이 말하지 않았나. “나쁜 여자가 되어야 해요.” 변화를 위해서라면, 나쁜 여자가 되어도 좋다. 내가 노브라로 다님으로써 ‘노브라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익숙해져야 하는 쪽은 바로 남성 중심적 사회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몸에, 여성의 외침에, 여성의 몸짓에 이 사회는 익숙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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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한번 맛본 자유의 공기

<델마와 루이스>


황진미 영화평론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는 1991년 5월에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그해 칸 영화 폐막작으로 선정되었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가 모두 후보에 올랐다.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수상은 <양들의 침묵>의 조디 포스터에게 돌아갔지만, 그녀들이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한국에서는 1993년 11월에 개봉되었다. 90년대 초 대학과 문화비평계를 중심으로 막 성장하기 시작하던 페미니즘 담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던 여성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에 동일시되어 묘한 해방감에 들떴다. 비디오로 몇 번씩 돌려보면서 감흥을 오래토록 이어나간 이들도 많다. 올해의 여성드라마로 손꼽힐만한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TV로 <델마와 루이스>를 보던 희자(김혜자)는 정아(나문희)에게 말한다. “이 영화는 봐도 봐도 재밌어. 정아야. 우리 델마와 루이스처럼 여행가자. 이 집 팔아서...” 그렇게 말하던 두사람은 실제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가 싶더니, 얼마 가지 못해 사고를 친다. 마치 델마와 루이스처럼. 두 사람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초조함에 시달리면서도 둘의 우정을 더욱 공고히 굳히는데, 이러한 에피소드는 거의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헌정처럼 느껴진다. 드라마로 한번 환기가 되었기 때문인지, 지난 9월 3일에는 <EBS-세계의 명화>에 <델마와 루이스>가 방영되었다. <델마와 루이스>가 어떤 영화인지 모른 채 본 시청자들은 아직 스타가 되기 전 브레드 피트의 풋풋한 모습을 알아보고 놀라워했다. 


<델마와 루이스>는 가부장적 지배질서에 억눌려왔던 평범한 여성들이 우연한 사고로 저항과 해방의 정서에 눈뜨는 성장드라마로, 페미니즘 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영화의 서사적 측면도 굉장히 잘 짜여 있지만, 장르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델마와 루이스>는 주인공인 두 여성의 이름을 딴 버드 무비이자, 광활한 미 대륙을 자동차로 달리는 로드무비이자, 살인과 강도행각을 벌이며 탈주하는 범죄영화이다. 버드 무비, 로드 무비, 범죄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런 장르의 영화들 중 대부분은 남성 주인공들을 내세운 영화였다. 어쩌다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트루 로맨스>처럼 남녀 커플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을 뿐, <델마와 루이스>처럼 여성 주인공들로 이루어진 버디무비이자, 로드무비는 거의 없었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두 여성들이 길을 떠나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남성 캐릭터들은 대단히 기능적으로 사용된다. 두 여성의 남편과 연인, 그리고 길에서 만난 남자들과 그들을 쫓는 경찰 중 입체적으로 묘사된 캐릭터는 없다. 이러한 인물의 구성과 배치도 여성주의적 젠더 뒤집기로 읽힌다. 


1. 그녀는 왜 방아쇠를 당겼는가


델마는 억압적인 남편과 사는 전업주부이다. 그녀의 행동을 통제하는 남편으로 인해 델마는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루이스가 제안한 이틀 동안의 주말여행에 대해서도 델마는 며칠 째 입을 못 떼다가, 결국 부엌에 쪽지를 써놓고 나온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남편에게 쥐어 사는 델마에게 루이스는 “데릴은 네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지배적인 남편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오다 모처럼 떠난 여행인만큼, 델마는 해방감에 들뜬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몇 잔의 술을 마신 델마는 추파를 던지는 남자에게 호의적으로 대한다. 함께 춤을 추던 델마는 술기운이 오르자 밖으로 나온다. 남자는 성관계를 시도하는데, 델마가 거부의사를 밝히자 주먹을 날리며 강간하려 한다.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할지라도, 거부의사를 밝히는 여성에게 강제로 성교하는 것은 엄연한 강간이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성폭행이 일어나기 직전, 이들을 발견한 루이스가 총으로 위협하자 남자는 겨우 델마에게서 떨어진다. 그러나 남자는 사과나 반성 없이 “재미 좀 보려던 것”이라 말하며 두 여자를 모욕한다. 루이스는 “여자가 저렇게 우는 것은 재미가 있어서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총을 쏘아 응징한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루이스는 경찰서로 가지 않고 달아난다. 


루이스가 총을 쏘고 경찰에 가지 않은 것은 그가 겪은 경험과 관련이 있다. 영화는 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루이스가 그와 유사한 성폭행과 경찰에 의한 2차 피해를 겪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그러한 피해의 경험이 얼마나 깊은 분노와 증오로 남았으며, 경찰과 법을 불신하게 되었는지 알게 한다. 루이스는 델마가 남자와 춤추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에, 성폭행을 저기하기 위해 총을 쏘았다는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폭행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 경찰이나 사법부, 그리고 사회적 여론이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일단 도망을 택한 루이스는 애인에게 도주자금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제이디에게 도주 자금을 모두 도둑맞으면서 일이 꼬인다. 애초에 이들은 성폭행의 피해자들이었지만, 그에 대한 분노로 인해 살인범과 강도가 되어 탈주하기에 이른다. 일이 이렇게 커지게 된 건 무엇 때문일까. 만연한 성폭력과 2차 가해가 이들을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2. 그녀는 어떻게 변모하는가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변모를 보이는 인물은 델마이다. 그녀는 남편의 권총을 여행 가방에 넣을 때만해도 징그러운 물건을 집듯 다루었다. 사용법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델마는 “마치 타고 난 것처럼” 능숙하고 침착하게 총을 다룬다. 


델마는 4년 연애 끝에 18살에 남편과 결혼했다. 델마는 평생 다른 남자를 사귀어보지 못했다고 하니, 남편은 델마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남자이다. 하지만 델마와 남편이 그리 다정해보이지 않는다. 델마가 만35세쯤 되었으니, 결혼생활에 진력이 나서였을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영화는 델마와 남편 사이를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회상장면을 넣지 않는다. 대신 현재의 몇 장면으로 남편이 델마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짐작케 한다. 가령 경찰들이 찾아와 그의 집에 전화를 도청하겠다고 하자, 남편은 비용은 누가 대는지 묻는다. 집나간 아내보다 푼돈이 더 걱정인 것이다. 반갑게 전화를 받으라는 경찰의 지시에 따라 남편이 다정하게 전화를 받자, 델마는 대번에 ‘평소 같지 않음’을 눈치 채고 끊는다. 집에 진을 친 경찰들이 TV 드라마를 열중해서 볼 때,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채널을 돌리다 경찰들의 눈총을 받지 채널을 되돌린다. 델마와 있었다면 그는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봤을 것이다. 


그런 남편과 살아오며 유약하고 순진한 소녀처럼 보이던 델마는 어느 순간 확 달라진다. 결정적으로 바뀐 시점은 길에서 만난 제이디와 하룻밤을 자고 난 뒤 부터이다. 제이디가 돈을 훔쳐간 것을 안 루이스가 망연자실해 있을 때 델마는 루이스의 팔을 잡아끌며 나가자고 말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델마는 루이스에게 의존적이었지만, 이후 관계는 차츰 역전된다. 델마는 홀로 강도행각을 벌이고, 경찰을 총으로 위협해 감금하는 일을 주도한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할까. 제이디와의 하룻밤은 앞의 성폭행 미수사건과는 완전히 다른 결을 지닌다. 앞의 사건에서 델마는 수동적인 존재였고,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그 사건 후 델마는 더욱 위축되어 아이처럼 징징대며 루이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등 짜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제이디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달랐다. 델마는 제이디의 잘생긴 외모와 공손한 태도에 반해서 처음부터 호감을 드러낸다. 그를 차에 태워주자고 루이스에게 사정하는 가하면, 제이디가 방으로 찾아와 말을 걸자 반갑게 맞는다. 델마는 제이디와 장난치면서 즐겁게 대화하고, 원하는 순간 흡족한 섹스를 나눈다. 델마가 직업을 묻자 제이디는 “강도”라고 답한다. 델마는 반신반의 했지만, 그 말은 진실이었다. 결국 그는 루이스의 돈까지 훔쳐 달아남으로써 좀도둑임을 증명하지만, 그와의 짧은 진실한 만남은 델마의 자존감을 고양시킨다. 


그와 섹스 한 다음 날 델마는 마치 약이라도 빤 듯 행복감으로 붕 떠 있다. 남편밖에 몰랐던 그가 다른 남자와 맺은 성관계로 인해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이제야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 완전히 딴 세상이더라.”라는 말은 단순한 성적 오르가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상태에서 상대에게 존중을 받으며 대등하게 이루어진 성관계를 통해 델마는 그동안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온전한 자존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루이스는 돈을 잃은 것에 낙담하지만, 델마는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 오히려 루이스를 위로한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깟 돈 내가 뭐든 해서 벌면 될 거 아니야’ 라고. 길을 떠날 때 루이스는 델마에게 “남편이 하는 낚시를 우린들 못할게 뭐냐”고 말했었다. 지금 델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제이디가 한 강도짓을 나라고 못할 게 어디 있나’ 라고. 그는 제이디에게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만난 사람들은 원망의 대상이 아닌 배움의 대상이다. 자아가 확립된 주체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가르침과 교훈을 얻어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아를 확장시킨다. 델마는 강도짓과 경찰감금을 벌인 후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뭔가를 건너왔고, 이대로 살수가 없다고. 그리고 어느 때보다 깨어있는 느낌이라고.  


델마가 검문하던 경찰을 감금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유혹이라도 할 것처럼 살살 웃으며 다가 온 델마는 경찰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그 순간 경찰의 태도가 싹 바뀐다. “마치 나치 군인처럼” 번쩍이는 제복을 뽐내던 경찰은 자신만만하게 그녀를 대했지만, 총을 본 순간 어린애처럼 벌벌 떤다.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총으로 표상되는 남근의 유무에 의해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유조차 운전수와의 만남도 인상적이다. 처음 마주쳤을 때, 친절하게 양보를 하는 듯 굴던 운전수는 여자 둘이 탄 차임을 알자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혀와 손동작으로 성희롱을 해댄다. 두 번째 마주쳤을 때 “내가 폭풍 같은 사랑을 가르쳐줄까?”라고 말하며 희롱한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났을 때 “진지하게 만나자”는 말에 그녀들이 차에서 내리라고 하니, 성관계라도 하게 되는 줄 알고 기대에 부풀어 내린다. 하지만 그녀들이 성희롱을 따지며 사과하라고 말하자, 거부하며 성적인 욕을 해댄다. 그는 사회적으로 마주치는 모든 여성을 자신의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여성이 강한 어조로 잘잘못을 따지고 사과하라 말하자 더욱 폭력적으로 응수하는 흔한 ‘여혐 종자’의 모습을 재현한다. 이미 남성적 권력의 허세와 실상을 알아버린 두 여성은 유조차를 시원하게 폭파시켜 버린다. 




3. 허공에의 질주

명장면으로 꼽히는 영화의 엔딩에 대해 말해보자. 델마와 루이스는 왜 허공에의 질주를 선택했을까. 영화 안의 두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일종의 의아함이다.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은 주 경찰이다. 두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렸으며, 나쁜 남자들에 의해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그는 루이스에게 살인사건에 대해선 혐의를 벗을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러한 회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비록 범죄로 시작된 것이지만, 처음 느낀 자유를 반납하고 이전에 머물렀던 세계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는 까닭이다. 델마는 이렇게 된 걸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흔쾌히 답한다. “네가 성폭행범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내 인생은 어차피 나빠졌을 테고, 지금처럼 재미있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성폭력 피해자로 사회적 비난에 시달리느니, 강도로 살다가 죽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이들이 범죄자로 도주함으로써 인생을 망치게 된 게 아니라, 어차피 망할 인생에서 나름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 경찰과 연방경찰 기동대의 엄청난 추격을 받게 된 이들은 질주를 거듭하다 그랜드 케니언 직전에 멈춰선다. 그리곤 “잡히지는 말자. 계속 가는 거야”라는 델마의 말 한마디에 둘은 웃으며 굳건히 손을 잡고 계곡 아래로 질주한다. 이들의 차가 허공에 머문 채 끝나는 엔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 내내 루이스는 한사코 텍사스에 발을 들이는 걸 거부하였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을 억압하던 공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엔딩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 며칠 동안이었지만, 도망노예의 신분이 되어 광활한 대지의 숭엄한 기운과 자유의 공기를 흡입한 이들은 자신을 억압해 온 지상의 어느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차라리 허공에 머물지언정, 그것이 죽음을 의미할지언정, 그들은 자유민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이되 죽음이 아닌 영화의 엔딩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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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건강한 포스트-가부장제의 꿈

<안토니아스 라인> 


황진미 영화평론가


<안토니아스 라인>은 네덜란드의 감독 마를린 호리스의 1995년도 작품이다. 이듬해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과 토론토 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하였고, 한국에는 1997년에 개봉되었다. 이후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으로 회자되면서, 2009년에는 ‘관객이 뽑은 예술영화’로 선정되어 재개봉되었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마를린 호리스 감독은 페미니스트 여성감독으로 1982년 <침묵에 관한 의문>을 통해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의 분노와 여성들 간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다소 결을 달리하여, 여성 4대를 중심으로 한 대안적인 공동체를 보여준다. 감독은 “내가 살고 싶은 유토피아적 세상에 대한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즉 영화는 가부장주의를 넘어선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유토피아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이다. 





1. 모계 4대의 가계도


영화는 네덜란드의 농촌을 배경으로, 일레곤다-안토니아-다니엘-테레사-사라로 이어지는 모성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는 생의 마지막 날을 맞은 안토니아의 회상을 통해 안토니아 집안의 역사를 들려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20년 전 고향을 떠났던 안토니아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16세의 딸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다. 안토니아는 어머니와 끝내 화해하지 않는다. 이는 안토니아가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단절의 의미이다. 안토니아의 아버지는 매춘부들과 어울리다 죽었고, 일레곤다는 죽은 남편을 30년 동안 원망하다가 치매에 걸려 죽는다. 장례식 도중 관에서 벌떡 일어나 환희에 찬 미소를 보이는 일레곤다의 모습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해방되었음을 가리키는 은유이다. 


아비 없는 딸을 데리고 고향에 온 안토니아에 대해 고향 사람들은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안토니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안토니아가 들어오는 마을 담장에는 “환영, 우리의 해방군”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이는 물론 나치를 몰아낸 UN군에 대한 말이지만, 앞으로 안토니아가 마을에 가져올 변화에 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안토니아는 물려받은 농장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톨릭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 종속되어 있던 마을에 ‘해방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안토니아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 없이 딸 다니엘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여자 둘이 어떻게 그 많은 농사일을 감당하겠냐고? 안토니아 농장에는 차츰 사람들이 늘어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안토니아가 천대받던 지적장애인 루니 립을 도와주자, 그는 안토니아의 농장에 와서 일한다. 오빠들에게 조롱당하고 성폭행을 당하는 지적 장애인 디디를 다니엘이 구출해오자, 디디는 안토니아의 집에서 살게 된다. 둘은 심지어 결혼한다. 20년 전 마을에 들어왔으나,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당하던 바스는 안토니아에게 청혼한 뒤 거절당하지만, 그와 친구이자 연인관계가 된다. 바스와 다섯 아들들은 안토니아의 농장에 들러 힘든 일을 돕는다. 도시에 살던 미혼모 레타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안토니아의 농장에 와서 산다. 교회를 떠난 보좌신부도 안토니아의 농장에 깃들고 레타에게 반해 둘이 결혼한다. 다니엘은 미혼모로 딸을 낳고, 딸의 선생님과 동성 연인이 된다. 등등. 이런 식으로 마을에서 소외되고 배척되었던 장애인, 이방인, 미혼모, 동성애자 등이 안토니아의 긴 야외식탁에 모여든다. 


2. 결혼, 이성애, 모성을 거부하는 그녀들


바스는 안토니아에게 청혼한다. “나는 홀아비이고, 당신은 과부이고, 또 예쁘고, 내 아들들은 엄마가 필요하고, 당신도 남편이 필요하고...”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결손가정’들끼리 합쳐서 ‘정상가정’이 되자고 제안하는 바스. 하지만 안토니아는 “나는 아들도 남편도 필요 없다”고. 거절한다. 다만 당신이 가끔 와서 힘든 일을 해주면 나도 답례를 하겠노라 말한다. 이후 바스는 안토니아의 친구이자 안토니아 집안의 지지자가 된다. 몇 년 후 안토니아가 성욕을 느낀다며 함께 사랑할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말하자,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섹스를 한다. 둘은 끝내 결혼하지 않고 연인이자 동반자로 남는다. 


다니엘은 결혼 없이 아이만 갖기를 원한다. 안토니아는 다니엘의 도시로 데려가 물색한 남자를 만나게 해준다. 남자를 유혹하여 동침에 성공한 다니엘은 임신한다. 다니엘의 임신은 마을의 신부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듣지만, 다니엘과 안토니아는 당당하게 맞선다. 테레사를 낳은 다니엘은 후일 테레사의 여교사 라라에게 첫눈에 반해 연인이 된다. 다니엘은 미혼모이자 동성애자로 살아간다.


천재인 테레사는 4살 때부터 할머니의 친구인 골방 학자인 크룹 핑거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며 자란다. 대학에 진학한 테레사는 여러 남자들을 만나지만,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의 곁에는 어린 시절부터 테레사에게 한결같은 순정을 바치는 시몬이 있다. 테레사는 시몬과 결혼하여 사라를 낳는다. 그러나 육아는 시몬에게 육아를 맡기고 자신의 공부와 일에 집중한다. 그는 모성애가 없는 어머니이지만, 그에게 모성을 강요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는 결혼, 이성애, 모성 등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지닌 채,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남성들과 평화롭게 공존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평화로운 삶을 짓밟는 사건이 일어난다. 동생인 디디를 강간한 일로 마을을 떠났던 피터가 마을에 돌아와 테레사를 강간한다. 영화는 테레사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담지 않는다. 강간사건은 한 줄의 내래이션으로 처리하고, 테레사가 가족의 보살핌을 받는 장면과 안토니아가 장총을 들고 피터를 찾아가 저주를 퍼부으며 응징하는 모습을 길게 담는다. 이것은 강간을 다루는 영화적 태도로 기억할 만하다. 강간을 재현함으로써 관음에 빠지지 않고,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가해자에 대한 응징을 훨씬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다. 또한 가해자에 대한 응징이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언어를 통한 사회적 매장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피터는 이후 다른 이들에 의해 물리적 응징을 당한다. 


영화가 강간을 재현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다. 영화는 섹슈얼리티를 금기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넘치게 재현한다. “사랑은 모든 곳에서 피어났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안토니아와 바스, 다니엘과 라라, 디디와 루니 딥, 파계한 신부와 레타의 섹스를 교차편집으로 담는다. 늙은 이성애 커플, 동성애 커플, 장애인 커플, 성적 경험이 적은 남자와 많은 여자 커플 등의 섹스가 어우러진다. 어린 테레사가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다고 불평할 정도로. 영화가 이처럼 다양한 커플들의 섹스 장면을 교차편집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동성애이든 이성애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늙었든 젊었든, 성적 경험이 많든 적든 아무런 차등이 없는 사랑임을 강조하는 뜻을 지닌다.


영화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들과,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소외되고 배척당하였던 소수자들이 모여 이룬 안토니아 집안을 비추며, 그 반대편에 가부장적 질서에 지배되는 피터의 집안을 대조적으로 비춘다. 마을의 가장 큰 농장의 주인인 댄은 자신의 장애인 딸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조롱한다. 디디를 멸시하던 장남 피터는 디디를 성폭행한다. 집안에서 아무런 힘이 없던 어머니는 디디를 지켜주지 못했다. 디디를 강간한 사건이 알려지자 마을을 떠났던 피터는 이후 군인이 되어 마을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유산을 받기 위해서였다. 피터는 다시 테레사를 강간한다. 안토니아의 저주를 받은 피터는 마을 사람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동생에게 살해된다. 대농장을 소유한 번듯한 유지였지만, 가부장적 질서가 강고하게 지배했던 피터의 집안은 근친상간과 형제살해 등으로 망한다. 댄과 얀이 수확기에서 떨어지거나 자신이 기르던 소에 받혀 죽은 것도 상징적이다. 이는 자신이 지배하던 대상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폭력적 지배의 아이러니를 비춘다. 


3. 학문, 종교, 예술 


안토니아가 농부라는 사실도 상징적이다. 안토니아는 떡 벌어진 어깨에 글래머러스한 몸매, 그리고 강한 근력을 지닌 여성이다. 그가 꼿꼿한 자세로 서서 씨를 뿌리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건강한 생명력을 지닌 그가 집안의 가모장으로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신의 뜻에 따라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와 반대되는 인물이 골방 학자 크룹 핑거이다. 그는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세계관도 몹시 굽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죽는 것”이라는 염세주의 철학을 지닌 그는 전쟁 이후 골방을 나가지 않는다. 물론 나치가 휩쓴 세상에서, 인류의 지성을 탐독한 학자가 스스로를 유폐한 것은 나름 양심을 지키려는 저항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의 지성은 세계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못한다. 그는 어린 테레사의 천재성을 사랑했지만, 테레사의 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낳은 사라에게 천재성이 없자 그는 실망한다. 그는 비관주의자인 신념에 따라 자살한다. 크룹 핑거의 삶과 죽음은 이성의 극점에 놓인 존재가 품은 근원적인 나약함을 보여준다. 그는 끊임없이 탐구하고 해석하지만,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를 지식인이자 친구로 존중하는 안토니아를 통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드러내지만, 그것이 지닌 한계도 명확히 보여준다. 자폐적인 지성의 끝은 죽음이요, 무신론자인 그의 신념처럼 거기엔 아무런 구원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종교에 대해서도 나름 견해를 피력한다. 일레곤다의 장례를 치르러 마을에 온 안토니아는 수녀들을 보고 “아직 멸종하지 않았군”이라 말한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안토니아가 가톨릭교회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의 임신에 대해 신부가 죄악이라고 강론하자, 그의 성추행을 빌미로 협박하여 강론의 내용을 바꾼다. 안토니아가 가톨릭교회를 전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의 강론 내용을 바꾸는 것은 안토니아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본질이 가부장주의나 금욕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종교와 성적 억압에 대한 영화의 생각은 신교도와 ‘미친 마돈나’의 일화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달을 보고 울부짖는 마돈나는 여성의 성욕에 대한 은유이다. 울부짖는 마돈나의 아래층에 사는 신교도는 막대기로 천정을 치며,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그녀의 성욕과 자신의 성욕을 자제시키기 위한 엄숙주의의 몸짓이다. 둘은 끝내 결합하지 못하고 ‘미친 마돈나’가 죽자 신교도가 그 울음소리를 따라 하다가 죽는다. 둘은 같은 묘에 묻힘으로써 마침내 사랑을 이루는데, 이는 종교적 엄숙주의가 향하는 것이 바로 ‘죽음을 통해서만 맺어지는 비극적 사랑’임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극성을 거부하는 인물이 바로 파계한 보좌신부이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사제복을 벗고 안토니아의 식탁에서 레타를 만나, 매년 주렁주렁 아이를 낳는다.


영화는 폐쇄적이고 비관적인 학문과 억압적인 종교의 폐해를 보여주면서, 그 대안으로 생명력 넘치는 농사와 예술의 힘을 말한다. 안토니아는 농부이고, 다니엘은 농부이자 화가이고, 테레사는 학자이자 작곡가이고, 사라는 시인이다. 그들은 각자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가부장제의 바깥에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는다. 이들의 삶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본원적인 창조질서에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의 공동체는 소수자를 품는 관용과 넉넉한 나눔과 동등한 질서를 지닌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걸맞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죽음을 직감한 안토니아에서 출발하여, 그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고, 죽었던 모든 이들이 그의 식탁에 모여드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장의사이자 산파인 올가의 존재가 말해주듯이, 죽음은 탄생은 별개가 아니다. 영화는 죽음과 탄생이 맞물려 순환하는 ‘존재의 춤’을 언급하며 아름답게 끝맺는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리얼리즘적인 작품이 아니다. 가령 안토니아, 다니엘, 테레사의 곁에 그녀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남자들, 그러니까 바스, 정자를 제공한 남자, 시몬 등 이상적인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일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이 판타지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대안적이고 건강한 판타지이다. 단지 가부장제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것이 극복된 이후의 공동체가 어떤 질서에 의해 새롭게 정초 될지 상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꿈을 꿀 것인가. 그 꿈이 바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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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불꽃같은 여자들의 달빛라이딩

<난소 싸이코단>


윤신 불꽃페미액션 활동가/알바노조 사무국장




주변에 있던 여성들에게 농구를 좋아한다고 습관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농구를 좋아하는 다른 여성을 만났고 여자농구팀을 꾸리기로 했다. 불꽃같은 여자들의 농구모임이라는 뜻의 ‘불꽃여자농구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어 홍보했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호응해줘서 금방 농구팀이 꾸려졌다. 농구의 기본 동작인 드리블, 슛 그리고 규칙도 모르는 여자 다섯 명이 운동장에 엉거주춤하게 섰던 것이 불꽃여자농구팀의 시작이었다. 나는 농구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같이 일하는 남성들과 점심시간에 농구를 했었다. 농구를 하는 과정은 재미있었지만, 체격이 크고 움직임이 거친 남성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고, 자연스럽게 생기는 스킨십을 경계하게 되는 것이 힘들었다. 남성들과의 실력차이, 일방적인 가르침, 그리고 여성들을 ‘봐주면서’하는 모습들도 불편했다. 이런 이유들로 점점 흥미를 잃었고, 점차 운동장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온통 남자들만 있는 대학 운동장에 불꽃여자농구팀이 모였다. 설레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다른 남성들의 비웃음을 사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농구가 시작되자  앞선 걱정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운동장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경기 후에는 코트 옆에 앉아 짜장면을 먹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상의 고민에서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농구를 하면서 우리는 여성들이게 몸을 쓴다는 경험이 얼마나 박탈되어 있는지 알았고, 그냥 여자들끼리 함께한 경험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서로를 얼마나 친밀하게 해주는지 알게 되었다.


여성들의 공동체가 주는 힘


몸을 부딪히면서 쌓은 서로에 대한 신뢰, 지지의 경험. 이것들은 여자들끼리 농구를 하면서 얻은 뜻밖의 선물이다. 나는 이 선물을 얻고 나서야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평소 내가 속한 공동체는 나에게 편한 공간이었는가? 아마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의 상황이 아닐 것이다. 여자농구팀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성들에게 ‘비빌언덕’이 없다. 주변에 여성이 맘편히 쉬고 놀고, 서로를 지지해줄 수 있는 공동체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변에는 끊임없이 성폭력 사건들이 일어나고, 2차 가해 또한 일상이 된다. 대부분의 공동체에서는 여성들은 항상 처신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하고, 자기검열 해야 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스트LA도 그렇다. 인종차별, 가부장제, 가난, 500년 식민지배의 역사 등에 의해 이 지역의 여성들은 억압받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억압받는 여성들이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치유 받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이스트LA에서 비혼모로 살아가고 있는 젤라는 주변의 여성들과 함께 난소싸이코단을 결성했다. 난소싸이코단은 이스트LA 지역의 유색인 여성 자전거단이다. 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밤거리를 누비며, 서로를 통해 위안을 받는다. 달빛라이딩을 하며 서로를 확인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공동체를 찾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다.


함께 싸워 ‘탈취한’ 것들


지지받는 경험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스스로의 편이 되지 못했던 우리는 이 경험들을 통해서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더욱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불꽃여자농구팀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감정들, 에너지들을 더 많은 여성들과 함께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온통 남자편만 드는 세상에서 여성주의적 액션을 하는 불꽃페미액션이 탄생했다. 불꽃페미액션은 더 많은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강남역 사건 이후 밤길 걷기(달빛시위)를 제안했다. 수십에서 백여명의 행진 참가자들은 두 시간이 넘도록 길 위에서 소리쳤다. ‘두려움을 넘어 밤길을 되찾자’ 참가한 사람들이 이 사회로부터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얘기하면 서로에게 박수쳐주고 함께 울었으며 무한한 지지와 공감을 보냈다. 밤길 걷기를 하는 중간중간에 우리를 향해 욕을 하는 남성들을 향해서는 큰소리로 싸워 그 남성들을 몰아냈다. 이 경험은 난소싸이코단의 여성들의 경험과 상당부분 오버랩되었다. 그 많은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을까. 나는 여성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공동체, 각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공동체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스트LA에서 라이딩을 하는 여성들로부터도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이제는 불꽃여자농구팀, 불꽃페미액션, 최근 들어 시작한 줌바댄스 모임까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움직이고 있다. 어떤 모임이든 상관없이 우리 모임에 참여한 여성들은 스스로에게 어떤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경쟁, 피해서사, 두려움, 고립감이 주를 이뤘던 그동안의 사회로부터 벗어나 서로와의 만남 속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을 발견한다. 온통 남자들의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나의 언어를 찾고 나를 지지해줄 공동체를 만난다는 것. 우리에게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고 희망이다. 지구반대편에서 달빛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있을 여성들 또한 그럴 것이다. 이들에게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이 마음을 보내고 싶다. 당신 곁의 ‘난소 싸이코단’을 만나기를 바란다.




불꽃페미액션은 3월 농구모임을 시작하여, 5월 강남역 사건을 기점으로 온오프라인 상으로 서초경찰서 항의행동, 대검찰청 앞 항의행동, 우리는 기자회견女인가, 밤길걷기(달빛시위), 천하제일겨털대회, 가짜페미파티 등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소모임으로 불꽃여자농구팀, 줌바댄스모임, 책읽기모임, 고전영화모임 등도 진행 중이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facebook.com/feminist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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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과연 성차별은 사라졌을까?

<그 인권은 가짜다>


이미루 페미디아

 

10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이 '단순한 진심'을 주제로 10 10일부터 16일까지 대한극장에서 열립니다. 46편의 상영작 중에서도 올 한해의 흐름을 맞아 특별한 섹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피움 줌인, '단순한 지혜'에서는 페미니즘 투쟁사, 다양한 가족구성권, 진정한 성평등을 실현할 법과 제도 등 현재 페미니즘의 지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여성인권영화제가 페미디아와 함께 올해의 '단순한 지혜'를 소개해드립니다.

 


 

 

<미국인의 96%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믿고 있다. >

 

<그 인권은 가짜다>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가짜인가?” 감독은 현실에서 여성들이 겪어내는 일상의 차별을 영화에 고스란히 담는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우리 삶 곳곳에서 나타나는 이 차별들은 여성들을 지속적인 빈곤 상태로 내몰고 있는 것은 물론, 경력 단절 및 사회적 고립의 형태로 밀어내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리 천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을 부수는 문제이다.

 

단적인 예로, 임금문제를 들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 그와 동시에, 최저임금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64%는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 여성의 과반수 이상이 최저임금 직종에 종사함은 물론, 그 마저도 남성보다 임금이 적다는 말이다. 이는 한국의 상황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2015, 연합뉴스가 ‘2013년 여성의 경제활동자료를 분석한 결과 여성 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2100만 원으로 남성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인 (3700만 원) 57.7%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문제는 단순히 저임금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경우 경제활동을 하더라도 빈곤 상태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경우 법적으로 성차별을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가정폭력을 다루는 경찰의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에밀리 색(Emily Sack)은 인터뷰를 통해 가정폭력의 경우보다 제3, 모르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사건의 경우 경찰이 더 빨리, 강하게 개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젠더문제와 아무 상관관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대부분의 가정폭력 피해자가 여성임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 젠더문제라는 것이다. 에밀리뿐 아니라 다른 전문가들 역시, 가정폭력의 문제를 단순히 정신나간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젠더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영화에서는 폭력으로 수감된 여성의 90%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던 남성에 대한 폭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경찰에 수차례 신고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던 그녀들은 결국 자기방어(self-defense)를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기방어의 경우에도 여성에게는 법은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좋은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없고, 자기 변호를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의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의 경우,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곤 하기 때문이다. 오 제이 심슨(O.J. Simson)처럼 사람을 죽이고도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를 보면, 그녀들에게 가해지는 형량이 과연 동등한 무게로 처리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단 하룻밤에 일어난 사건, 2차 피해가 더 큰 상처

 

영화에서 배우이자 활동가인 패트리샤 알쿠에테(Patricia Arquette)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여성을,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얼마나 우위에 두느냐에 따라 피해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범위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녀는 강간당한 이후 여성들이 받아야 하는 각종 치료와 성병검사, HIV/AIDS 검사 등을 받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과 관련 이는 분명 법적으로 여성들이 비용할 필요가 없어야 하는 비용임에도 불구하고, 법을 만드는 이들이 이런 여성들을 보호해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있다고 강조한다. 임신 가능성으로 인해 여성은 더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하지만, 정작 임신한 여성을 보호하진 못한다. 감독은 이런 사건은 단순히 하룻밤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온라인을 통해 영원히 기록된다고 강조했다.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한 이후, 제대로 신고조차 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다 자살을 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는 명료하다. 제목이 말하듯이, ‘Equal means equal.’ 글자 그대로, 성별에 의한 차별 없이 동등하게 임금을 받고, 지위에 따라 동등한 일거리를 얻으며, 임신과 출산 등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것. ,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인간으로써 동등하게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아직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이 결코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괴롭지만 미래의 다른 여성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는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 페미디아는, 여성과 여성주의, 여성운동에 관련된 외신을 번역하고, 국내/외 연구를 소개하며, 여성주의적 시선의 비평을 싣는 온라인 여성주의 매체입니다. 이미루는 인천인권영화제 조직위원으로, 페미디아 번역팀에서 편집총괄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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