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까지

- 픽션 <열정의 끝>, 애니메이션 <집에 오는 길> -


류희정


 <열정의 끝>, 10대의 자신의 세계. 그녀의 사소하지 않은 열정을 만나다.



 주인공 미란은 체육대회 단체 줄넘기를 연습하다가, 자꾸만 줄에 걸린다. 연습을 감독하던 담임선생님은 더 잘하는 반 친구와 그녀의 자리를 바꾸기를 원한다. 순식간에 그녀의 자리를 뺏겨버린 미란은 더 잘할 거다, 연습해오겠다고 말한다. 학교가 끝나고 미란은 매일같이 줄넘기 연습을 한다. 이전보다 그녀의 실력은 빼어나게 늘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단체 줄넘기의 걸림돌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그녀의 종목을 바꾸라고 권유하다, 이내 화를 낸다. 선생님의 눈에 미란의 줄넘기는 ‘고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녀 탓에 반 친구들은 좋은 줄넘기 성적을 거두지 못할 거고, 이는 곧 체육대회 전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줄넘기는 과연 ‘고집’이었을까. 미란의 세계에서 줄넘기는 분명 ‘열정’의 조각이었을 것이다. 10대 소녀인 미란의 세계는 학교를 중심으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학교,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 학교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욕심들. 학교가 전부인 10대 소녀에게 그것은 동시에 그녀의 세계가 된다. 그 속에서 단순한 ‘줄넘기’라는 행위는 학교 내에서-그 세계의 중심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가 된다. 그녀가 매일 밤 줄을 넘을 때, 좌절했던 그 날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한 걸음씩 나아간다. 비록 타인의 눈에는 여전히 부족한 ‘넘기’일지라도, 그녀 자신에게는 스스로를 넘어야만 하는 가장 열정적인 행위-‘열정의 끝’이었던 것이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없는 단체 줄넘기와 체육대회가 시작하면서, 줄넘기에 대한 열정은 ‘끝’이 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한없이 줄을 넘으려고 했던 미란이라면, 또 다시 그 좌절의 벽을 넘어서는 열정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그것이 소녀가 소녀 자신의 세계에서 나아갔던 법이기 때문이다.


 <집에 오는 길>, 20대 그들의 세계. 일상적인 것들에 치여 사는 그녀의 세상을 사랑하다. 



 서울에는 수많은 단칸방이 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 단칸방에서 청춘을 시작했던 세대는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있다. 대학은 졸업했고, 새로운 일자리도 구했지만 여전히 단칸방 인생이다. 이렇게 사는 청춘이 이 집, 저 집 서울의 야경을 채우는 불빛만큼이나 가득하다. 

 20대 주인공의 삶은 그 청춘의 삶 중에 하나의 모습이다. 팍팍하다. 작은 방에서 시작해서, 더운 날 볕 아래서 인형탈을 쓰고 홍보 아르바이트를 한다. 출근길에는 그런 일상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과 부닥친다. 타인의 시선에서 그녀의 삶은 어쩌면 초라할지도 모른다. 광고홍보학과를 졸업했다는 그녀는 취업난 속에서 마케팅이라고 말하는 홍보 아르바이트를 한다. 꿈은 한 뼘 접혔고, 그럼에도 아등바등 살아가야만 하는 서울이라는 땅 위에서 그녀는 오늘도 하루를 보낸다. 내일도, 아마 그럴 것이다.

 영화를 보고서 10대에 꿈꾸었던 20대의 모습은 어땠을까. 주인공에게도, 내게도 묻고 싶어졌다. 아마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위풍당당하고 화려한 삶이었을 것 같다. 10대 시절 책상 앞에서 꿈꾸던 것들을 직접 이루어내고, 주목받는 멋진 어른. 그러나 잘 알고 있다. 내 삶이 그렇지 않은 것을.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조금씩 생활비를 쓰고 나면, 모아둘 푼돈 하나 없이 한 달 한 달을 지내 가는 삶, 취업 준비에 막막해서 미래를 그려보기 힘든 삶. 

 그러나 주인공은 그 날 일상을 마치고서, 들어선 집에서 말한다. “그래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해.” 타인의 눈에는 빛나지 않는 것들만 가득한, 치열한 우리네 20대의 삶을 그녀는 포근히 쓰다듬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허물을 벗은 그녀의 말이었다. 출근길 사람 가득한 서울의 지하철도, 더운 날 고생에 살이 빠져서 일석이조가 되었다는 그녀의 일자리도, 단칸방 작은 그녀의 공간도 사랑한다고. 

 처음 20대의 삶을 만났을 때, 그녀도 그 때의 나만큼이나-혹은 그보다 더 크게 좌절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다. 10대의 우리들이 꿈꾸어왔던 세상과 실제 세상은 너무도 달랐으니까. 하지만 그 꿈의 한 꺼풀을 벗겨내고 만난 삶과 보금자리는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만큼이나 소중하고, 아리도록 아름답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고, 동시에 우리네 20대의 삶이다. 10대의 당신이 끝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데에 열정을 쏟았다면, 한없이 달려온 20대의 당신에게는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던져도 좋을 것 같다. 이젠 자신의 세계를 충분히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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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기자단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성폭력의 사회적 배경과 개선의 방향

-<7년간의 투쟁>-

스티어 프레드릭

 



범죄가 한 사건일 때는 개인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반복적으로, 한 단체 중심적으로 향하거나,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시회적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학대를 당하는 아이를 돕고자 호주에서 온 봉사활동가인 샬롯 켐벨 스테판 (Charlotte Campbell Stephen)이  케냐에 도착한지 2개월만에[각주:1] 당한 집단 강간은 하나의 단일 범죄였다. 그러나 강간, 아동 성 학대와 기본적 생활의 필수품을 얻기 위한 생존 섹스 (survival sex)를 포함한 케냐에서의 수많은 성폭행 사건들을 모두[각주:2]살펴볼 때, 사회적 차원의 문제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재판 때 한 피고 측 변호사가 증거물을 숨기거나 바꾸는 행위는 법정 모독이자 사법 방해죄였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면허를 잃거나 재판에 제외조차 되지 않았고, 피해자가 포기하도록 지속적으로 재판을 방해할 수 있었다는 체계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는 샬롯이 대처해야 했던 상황이며, <7년간의 투쟁>은 그의 투쟁을 다루면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나이로비의 빈곤한 근교에서 사는 케냐의 여성의 이야기도 해준다. 이들의 재판이 진행되지 못하게끔 하는 다양한 사회적 요소가 있음은 물론 재판이 진행되더라도 계속 방해되고 연기된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새로운 판사에게 욺겨지기도 하고 재판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때도 있다. 피해자들이 또 다시 증언해야 하며 또다시 지독한 비극을 재경험해야 한다는 의미다. 케냐의 재판 절차가 기본적으로 느린 게 아니라,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재생하면서 절망을 느끼고 포기하게 하는 피고측의 의도적인 전략이 과정 내내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방해들이 너무나 많아서 샬롯이 집당 강간을 당했음을 신고했을 때 경찰은 “케냐에서 강간 사건 재판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실은 케냐에서 강간을 당했더라도 대부분의 피해자는 신고조차 하지 않고, 신고해서 가해자를 기소하더라도 그들이 증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샬롯은 포기하지 않고, 정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기로 했으며 증언 과정에서 가해자를 직접 대면함으로써 많은 피해 여성에게 희망을 주었다.

<7년간의 투쟁>은 매우 충격적인 방식으로 시작한다. 샬롯은 범죄 장소에 다시 돌아가서, 8시간 동안 남자 4 명한테서 강간을 당했던 침대에 다시 누워서 그 경험을 상세하게 진술한다. 다른 피해자들과 탈출하는 과정에서 살해도 당할 뻔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섬뜩했는데도 카메라 앞에서 끔찍한 범죄를 재생하면서 사실 대로 털어놓은 침착한 말투에 나는 참 놀랐다. 그리고 그 이유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사소해보이는 일들이 나에게 제일 충격적이었다. 예를 들어 가해자 중에 한 명이 십자 목걸이를 쓰고 있었는데, 샬롯은 그 목걸이를 잡고 좀 전에 총을 입 안에 넣었던 가해자에게 “너는 무슨 기독교 신자이냐”라고 고발하면서 계속 도전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이 다큐멘터리는 샬롯의 집단 강간 사건 재판을 중심적으로 다루었으나 강간에 대한 고발과 처벌을 방해하는 법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인 탐구를 하기도 하며 깡패 예방 세미나,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 단체, 주민을 위한 법 설명회 등 사회 발전을 위해 투쟁하는 운동가의 이야기도 다룬다. 범죄와 얽힌 사회 배경에서부터 뇌물, 부패, 그리고 법적 전략까지 여러 단계에서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7년간의 투쟁>은 이 문제를 대처하고 정의, 개혁, 그리고 평등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는 케냐라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7년간의 투쟁> 상영 후에 관람한 미국의 학내 성폭력을 다루는 올해의 개막작인 <헌팅 그라운드>, 그리고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가정폭력에 대한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을 같이 보면 여러 공통점을 살펴볼 수 있다. 여러가지의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각주:3] 차별적 상황에서 여성은 더 많은 피해 입기도 한다는 것, 또한 이 상황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리고 해결하기에 어떤 방해들이 있는지를 고려하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몇 가지 단계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법의 문제들이 있다. 이는 부당한 사건을 예방하는 법률, 또한 사건 발생시 처벌 법률이나 피해자를 지원하는 법률 혹은 그런 법을 시행하는 기관이 비효과적이거나 아예 부재하는 상황들이다. <7년간의 투쟁>에서 나오는 운동가에 의하면 케냐에는 상당히 강한 성범죄처벌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피고측 변호사를 증거물을 반납하지 않거나 기록을 바꿀 때 고발되지 않는 것과 같이 재판 절차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다. 이 변호사는 자꾸 재판에 몇 시간 씩 늦게 도착하지만 재판에서 제외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7년간의 투쟁>에서 집단 강간 범죄에 대해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대신 '무장 강도'를 근거로 유죄가 결정됐으며, 무장 강도는 사형으로 처벌되지만 (자동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강간은 최대 20년 징역이데다가 실제로는 2년 징역이나 봉사활동 같은 아주 경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개혁이 필요하더라도, 강간 범죄를 고발하고 처벌하는 법률 제체와 기관이 존재한다. 한 운동가는 성범죄처벌법의 힘을 강조했으나 누구도 신고하지 않고 법이 시행되지조차 않으면 어떤 법률이 아무리 강해도 무력한 법률이 돼버리는 것이다.

이 주장에는 불평등의 두 번째 이유가 포함되어 있다. 즉 법 실행의 문제이다. 경찰이 피해자의 케이스를 무시하거나, 신고를 기록하는데도 범인을 잡거나 증거를 찾지 않는 경우도 있다. 뇌물, 부패 그리고 특히 노동 문제에 포함된 보복이나 블랙리스트도 이 단계에 포함된다. <7년간의 투쟁>에서는 샬롯이 만난 모든 경찰, 기소측 변호사, 그리고 판사들이 성실하고, 정의로운 존재로 묘사되지만, 다른 사람이 같은 상황에 빠져 있을 때에는 경찰소에서 신고를 받아주지 않거나, 가해자가 경찰이나 군인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정치 기관이 없다는 사건이 흔히 언급된다.

그러나 강간 범죄를 신고하기 힘든 이유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문화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피해자임을 알게 되면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소외되는 경우도 많다. 어떤 피해자들은 피해자인데도 자책하기도 하고 강제로 당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명예로 받아들이기도 하다. <7년간의 투쟁>에서는 그러한 문제들이 자꾸 언급된다. 많은 피해 여성들이 부끄러워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임을 알게 되면 다시 성폭력을 당할 확률이 높아지는 게 끔찍하지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독하고 비극적인 것은, 때로는 가해자가 가족이라면 가족 내에서도 신고하는 것을 막는다. 비뚤어지게도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가해자를 보호하면서 (주로 여성인)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운다. 그러나 케냐뿐만 아니라 <헌팅 그라운드>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학교의 명예 혹은 브랜드를 보호하기 위해서 교직원들 그리고 다른 학생까지도 피해자를 탓하고 위협하기도 한다. 가해자는 더욱 더 심했다. 법적 제도가 아무리 발전되었어도 이러한 문화적인 요소는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고발하지 못하게끔 하는 꼭 바꿔야 하는 문화다.

각 단계에서의 자세한 문제는 각 문화와 법적 제도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종류의 문제인지를 살펴보면 운동가들이 더 효과적인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문화에서 비롯된 불편등을 법적으로 해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에 대한 문화적, 대중적인 반발이 강할 때 관리할 법적 제도가 없으면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7년간의 투쟁>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한국에 거주하는 백인으로서 흥미롭던 점은, 샬롯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선택해서 소수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국을 떠나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법원이나 수업에서 영어를 사용하지만 많은 사람이 있는 곳, 그리고 특히 샬롯이 근무하는 빈곤한 근교에서, 스와힐리어를 사용한다), 도처에 보이는 소수민족되고, 그리고 케냐처럼 생활 수준에 큰 차이가 나는, 나라로 이동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다. 한 장면에서 샬롯은 양이 많고 멀리서 보이는 언덕이 있는 들판에 앉아 있다. 그 경치를 보고 진정하고, 안심을 느끼고, 다른 데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감정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 봉사활동, 즉 이타적인 의도로 케냐로 갔는데도 2개월만에 집단 강간을 당하게 됐단 사실을 살펴보면 그녀는 케냐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만큼 인상적이다. 케냐를 원망하지 않고, 빈곤, 억압, 그리고 차별에 시달리는 케냐의 사람들을 계속 도우려고 노력한다. 너무나 괴로운 상황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투쟁해서 자신의 고통을 용기와 힘으로, 자신의 개인적 비극을 사회적 희망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불만족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다. 특히 민족간의 관계를 충분히 탐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고측 변호사는 인종 차별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비난했다고 샬롯을 단 한 번 (거짓으로) 고발했고, 케냐 여자들은 백인 여자도 강간 당할 수 있음에 놀랐단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 외에는 인종 차별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대중, 법체제가 부당한 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샬롯을 계속 지원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경우와 다르단 점을 살펴보면 샬롯이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백인 호주 주민인 여성이기 때문에 다르게 취급하지 않았을까 궁금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피부보다도 경제적으로 강대국인 호주 (이 다큐멘터리를 지원한 나라) 에서 왔다는 게 더 중요했을 수도 있지만 <7년간의 투쟁>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분명히 다큐멘터리가 이슈에 접근하면서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 방식은 케냐 사람을 타자화할 위험을 적게 만들기는 하지만 교수와 민권 운동가인 미셸 알렉센더 (Michelle Alexander)가 주장했다시피 탈인종화된 (post-racial) 사회가 되고 싶은 목적만으로는 구조적인 불평등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7년간의 투쟁>은 전반적으로 잘 촬영한, 생각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다큐멘터리다. 주인공인 샬롯은 지독한 경험에 대처할 뿐만 아니라, 정의를 이루고자 부당한 제체와 끝까지 투쟁하는 강하고 대단한 인물이다. “강간 사건 재판에 이기는사람이 없”는 나라에서 샬롯 켐벨 스테판은 불가능한 것을 실현했으며 그녀의 성공을 통해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수많은 피해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 다큐는 재판을 다루는 것 외에서도 전염병인 강간을 허락하는 사회 배경을 탐구하기도 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조직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7년간의 투쟁> 은 문제를 파악하는 뿐만 아니라, 개선 방향을 제공하고, 무엇보다도 희망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1. Davey, M. ‘I will not be silenced’: fight for justice that gave Kenyan Rape victims a voice The Guardian 2015/03/12 [본문으로]
  2. 영화에 나오는 한 성폭력 예방 수업에서 아는 사람 중에 강간을 당한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모른다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본문으로]
  3. 여기서 정의롭지 못한 상황은, 범죄나 피해 그자체보다도 범죄를 고발하거나 피해를 보상하지 못하게 하는 불평등하고 부당한  체계에 대해서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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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학내에서 ‘학내 성폭력’을 외치다
- 다큐멘터리 <헌팅 그라운드> -

 

 21세기 대학은 기업이다.

 대학이란 어떤 공간인가. 지식의 상아탑, 학문의 전당. 사람들에게 각인된 대학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고고한 이미지로부터 시작된다. 사회가 시장 자본주의 속에서 돈과 경쟁으로 물들어 버린대도, 대학은 언제까지나 정결하게 제 자리를 지킬 것만 같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이미지다. 하지만 이제는 대학이라는 ‘이미지’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이야기 해보자. 진짜 우리 사회의 대학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가.

 치열한 입시 경쟁과 ‘인 서울’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서열화된 대학 구조 속에서 학생들은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입학하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해당 대학이 어떤 학문을 어떻게 가르쳐주는가 보다는 해당 대학을 졸업하면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를 얻을 수 있는지가, 사람들의 더 큰 관심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21세기 우리 사회의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기보다는 대학의 이름을 판매하는 ‘기업’으로 점차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업화된 대학을 구매하는 것만으로 그/그녀들의 일이 끝나는 것이라면 문제는 없다. 대학은 그들의 이미지를 굳건히 유지하고,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상승하는 데에 힘쓰면 된다. 그러나 대학은 상품이면서 동시에 해당 대학을 선택한 학생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자 울타리가 된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그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기 때문이다.

 대학의 울타리는 그들에게 놓인 높은 벽이었다.

 이처럼 학생들은 대학 속에서 살아가고, 이 대학 속에서 안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또한 학부모들은 대학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대학의 이미지는 언제나 정의로웠고 고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들에게 놓인 대학을 보며 깨닫는다. 그들을 지켜 주리라 믿었던 대학의 울타리는 타인에게 높은 만큼이나 그들 자신에게도 한없이 높은 벽이었다는 것을.

 대학이 가진 명예로운 이미지라는 틀 속에 갇힌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학내 성폭력의 생존자임을 밝힐 수도 없게 만들었다. 대학은 명백한 피해자인 그들에게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이유로 도리어 비난하고, 사건을 은폐하고자 했다. 생존자를 보호하는 데에 앞장서기는 커녕 학교에 더 많은 기부금을 끌어올 수 있는 촉망 받는 가해자의 대변을 하기에 바빴다. 영화 속에서 논해진 대다수의 미국 대학은 성폭력 사건을 인정함으로써 학내 학생들을 가해자의 사냥터(헌팅 그라운드)에서 보호하기 보다는, 현재의 명예 유지와 기부금을 끌어올 수 있는 재원-가해자를 택했다. 생존자들은 성폭력뿐만 아니라 그들이 겪은 경험조차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대학의 벽 앞에서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상영작 헌팅그라운드 스틸 컷>

 

 “당신이 겪기 전까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Till it happens to you, you don't know.)”

 대학의 울타리 속에 은폐된 학내 성폭력 문제는 자신이 성폭력 생존자임을 외쳤던 두 명의 여학생들에 의해 미국 사회는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피해자를 외면하는 학교 당국과 함께 그들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은 ‘거짓말’이라며 외면했던 사회에게, 그들은 말했다. 가장 사적이고 솔직한 그들의 이야기였다. ‘나는 이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며, 어느 날 성폭력을 당했다. 나는 성폭력의 생존자다.’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이해해보려 노력하지도 않았던 그 하나의 울림은 미국 전역의 아우성이 되었다. 생존자들은 연대했고, 생존자들이 아닌 이들도 연대했다. 학내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던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 속에서 수면 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이었다.
 
 “만약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10만 명의 학생들이 내년에도 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할 것입니다.”

 대학은 자신의 명예로움을 지키기 위하여 생존자들의 고백에 귀를 막았다. 그러나 귀를 열었을 때 정작 불명예스러운 것은 성폭력 생존자들의 고백이 아닌 귀를 막았던 대학 자신이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건 가장 불명예스러운 부정(不正)한 대학의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생존자들의 연대와 지지는 그들의 대학을 바꾸는 큰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 원동력을 추동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고백과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지지였다. 변화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대학은 어떠한가. 최근 ‘고대 의대생 사건’와 같이 수면위로 드러난 학내 성폭력 문제조차 대학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불명예스러운 일로 학교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를 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10만 명의 학생들이 내년에도 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할 것입니다.” 라는 영화의 문구처럼 한국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학내 성폭력이 그저 가끔의 특별한 이슈로만 드러났던 건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조건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제 고개를 들어 살펴보자. 이제 미국의 그(녀)들이 고백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처럼, 우리 사회의 생존자들의 고백에 귀 기울여 보자. 대학의 벽을 넘지 못한 학내의 목소리에 따뜻한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자.

 그녀들의 고백과 우리들의 따뜻한 연대가 만날 때 우리 사회의 변화도 시작될 것이다.

글. 류희정_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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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기자단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고백’의 힘'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고백의 방향’ 개막



*강수희_한국여성의전화 대학생기자단






매번 다른 슬로건을 선보였던 여성인권영화제가 올해는 ‘고백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찾아왔다. 말하기는 목소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 오프닝은 소리 댄스 프로젝트(명지혜, 이민숙)의 춤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고백하기 직전의 숨소리, 이 고백을 할까, 말까 망설이며 이리저리 까딱이는 발. 소리 댄스 프로젝트의 동작 하나에 500여 명의 관객이 숨죽여 공연에 집중하는 가운데, 9월 16일 7시, 서울시 종로구 서울극장에서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의 막이 올랐다.


올해 19개국 29편의 영화를 상영하게 될 여성인권영화제 고미경, 손명희, 오영란 집행위원장은 ‘전화로, 이메일로, 맨얼굴로 전해 온 뜨거운 고백 덕분에 조금씩 나아져 온 여성인권의 현실’과 더욱 퍼져나갈 고백의 힘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고백이 가져왔던, 가져올 변화를 탐구하고자 한다’는 말로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의 개막을 선언했다.


개막을 축하하는 축사는 특별한 손님이 함께했다. 가정폭력 생존자인 ‘수지 엄마’ 윤필정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비상구와 같은 역할을 해준 여성의전화가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며 “참고 견디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많은 아픔을 겪고 있는 수많은 여성분이 소중한 나를 찾길 바란다”며 뜻깊은 축사를 전했다.





개막작 헌팅그라운드는 미국 대학 내 성폭력의 현실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성폭력이란 사건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임을 힘 있게 드러내는 영화였다. 생존자들의 단단한 고백의 목소리들이 연대하여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올해 여성인권영화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고백의 방향”과 맞닿아 있었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성폭력 상담원교육 수료를 받은 지인을 따라 개막식에 참석했다는 관람객 유진(27)은 "성폭력 상담원 교육의 과정이나 실제 사례에 대해 전해 들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폭력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며 개막작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날 진행을 도운 영화제 스태프 정민(25)은 "많은 분이 오셔서 개막식에 참여하는 것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게 보람 있었다 "원래 영화제 스태프 활동만을 생각했으나,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서 더 많은 사람이 여성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제가 있는 영화제, 소통하는 영화제, 즐기는 영화제,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제, 그리고 행동하는 영화제라는 다섯 가지 모토를 가진 여성인권영화제는 9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서울극장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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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잔인한 나의,

다큐멘터리/ 77/ 감독 아오리

 

"잔인한 직면 보다 더한 회피"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잔인한, 나의 홈> 포스터

 

잔인한 나의, 홈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직면되기 어려운 친족 성폭행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 소재의 무거움 때문에 어두운 영화를 생각했었다. 영화의 분위기는 소재의 특성보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다. 최대한 무감각하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돌고래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소재가 주는 무게감 보다 '돌고래'의 여정이 주는 감정의 변화는 잔잔하게 파고들어 예상치 못한 때에 나를 무너뜨렸다. 돌고래는 범행 사실을 부인하는 아버지와 믿어주지 않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떠나 집을 나왔다. 나는 사실을 안 순간이 직면의 도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고래가 세상과 맞닿드린 것은 중학교때 아버지의 범행사실을 안 후도 친구들에게 토로한 이후도 아니었다. 몇차례의 상담후 변하지 않는 가정의 모순된 논리를 벗어나 집을 나왔을 때 돌고래의 직면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던 깜깜한 앞날에 감사함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돌파하고 있는 지금의 투쟁이 재판의 승소가 마냥 기쁠 수는 없었다. 돌고래가 지키고 싶고 이 승소를 함께 하고 싶은 가족들은 돌고래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상처를 낳았다.

 

돌고래는 말했다. "이제는 믿고 싶어요."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인 가족이 불신의 표본이 된 돌고래의 말은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믿고 싶다는 말 끝에는 아직 치유되지 못한 '외로움'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돌고래가 원한다고 치유될 수 없는 곪아버린 상처 중 하나였다. 돌고래가 추석에 집에 내려갔을때 엄마 외 동생들은 돌고래를 보는 것을 거부했다.

 

돌고래와 엄마가 메신저를 보내는 장면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그들의 복잡한 심경이 전해져왔다. 가정을 지키고 싶지만 딸도 포기할 수 없는 엄마. 그런 엄마에게 가족의 구성원으로써 내쳐진 기분을 느끼는 딸. 둘의 마음은 서로를 포기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이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메신저에서는 어떠한 감정적 교감도 찾을 수 없어 보였다. 문자 메세지에 드러난 오해와 묵은 감정의 대립보다 더한 응축된 서로를 향한 표출되지 못한 마음이 느껴졌다. 엄마는 분명히 돌고래에게 안식처가 되주지 못하지만 돌고래를 포기하지 않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 어쩌면 더 잔인하게 다가왔다.

 

돌고래는 피해자임에도 자신의 말이 믿어지지 못하고 되려 가해자로 불리는 친인척들의 비난 속에 꿋꿋이 삶을 개척한다. 이러한 몸부림에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동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지방순회 상영을 했을때, 어머니들의 반응이 돌고래의 어머니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들도 돌고래를 가정의 파괴자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영화를 감상한 어머니들이 동화된 것은 돌고래가 아닌 돌고래의 어머니였다. 이것은 돌고래의 어머니처럼 그들이 자식을 낳은 어머니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시대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주입된 인식은 그들이 가진 가정에 대한 인식을 뒤틀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유지를 위한 희생이 정당화가 되어온 그들의 삶. 이들은 이제껏 얼마나 많은 희생들이 있었기에 이렇듯 당연하게 참아야한다고 생각할까? 살아온 이들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회피가 있었을지 지레 짐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유지된 이들의 울타리는 과연 견고할 수 있을까? 돌고래의 가장 외로운 직면의 순간의 가족 되어 준 것은 친족이 아닌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판사는 재판 후 돌고래를 불러 이야기 했다. “생각보다 주변에는 너를 도와줄 사람들이 많다.” 영화는 범죄의 직면 뿐 아니라 가정이란 개념에 대해 재정립하게 만들었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잔인한 나의, 홈> 스틸컷

 

영화를 보는 내내 억눌려 있는 나의 인권의식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돌고래의 가족들에게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내가 돌고래의 자매였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내가 돌고래 편에 설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고소한다고 했을때 그것을 도울 수 있을까? 돌고래의 자매들에게 아버지는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수감시키는 법적형벌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질문은 확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범죄를 저지른 자가 당연하게 받아야 되는 형벌을 고민하는 내 모습에서 모순된 나의 인권의식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드러나지 않은 2차 가해자가 될 가능성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높다고 할 순 없지만 낮은 인권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뱉는 말들이 머릿 속에서 만들어진 사실일 뿐 진실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영화를 통해서 부셔질 것이라고는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아는 인권에 대한 '정답'이 고정된 것이 아닌 '내 삶' 속에 동행하는 해답이 되기를 기대한다.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 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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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그 여자, 박제된 공주, 충심 소소, 플라멩코 소녀]

트렌스젠더, 범죄에 노출된 여성, 불법 탈북자 여성, 취업을 앞 둔 여고생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네 가지 단편은 각각의 여성들이 사회에서 어떠한 약자적 위치에 처해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번 여성인권영화제의 주제인 ‘직면의 힘’이라는 말처럼 어떻게 자신을 직면하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그려낸다.

 


 

외면도, 내면도 진짜 여자가 된 <그 여자> 윤희        

 

 

 주인공 윤희는 누가 봐도 여자다. 동네에서 우유배달을 하고, 아줌마라고 부르면 자연스레 대답하는 아주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트렌스젠더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불편하다. 그래서 윤희는 호적정정신고를 더 간절히 원했고,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 속 깊이 묻어둔 가족을 항상 그리워했다. 발목을 다치면서까지 남의 가정을 훔쳐보고, 그 가족이 상을 당하자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넋을 잃는다. 자신의 아픈 발목, 더 아픈 마음을 치료해주는 것은 엄마라는 사실에 눈물 흘리며 엄마를 찾아간다. 그녀는 두려워 피하기만 했던 남들의 시선에 비로소 정면으로 맞서며 진짜 여자가 되어간다.

 

 

 더 이상 공간 속에 갇히지 않을 <박제된 공주> 명진        

 

 

 주인공 명진은 돈이 없어 당장 셋방에서 쫓겨날 신세에 처해있다. 겨우 예산에 맞는 집은 열악한 지하 셋방뿐이고 싼 값에 이사하게 된 좋아 보이는 집은 섬뜩한 사연이 있는 집이다. 이 영화는 집 자체를 사회에 비유하고 있다. 가난한 여성의 삶이 어떤 밑바닥까지 경험하게 되는지, 그리고 여성들을 어떻게 범죄의 세상으로 내몰리고 있는지를 그린다. 오늘 만난 이웃여자가 싸늘한 주검이 될 수도 있으며, 나는 오늘 피해간 범죄이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여성의 안전에 대한 문제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모호하게 끝이 난다. 그녀가 그 집에 대한 사연을 알았든 아니든, 혹은 알고도 살기로 했든 아니든, 그녀는 스스로 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푸른 빛의 그녀, <충심, 소소>        

 

 

 이 영화는 대한민국에 사는 탈북자가 아닌 중국에서 떠돌아다니는 탈북자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실제로 탈북자들이 중국의 국경을 넘지 못하고 심각한 인권유린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 탈북자 중 한 명인 소소는 충심의 별명이다. 가슴과 엉덩이가 작다고 붙여진 별명이었지만 그녀의 삶이 딱 小小다. 자유를 찾아 죽음을 각오하고 국경을 넘었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가혹하다. 그녀가 갈 곳이라고는 안마방들뿐이며, 아저씨의 말처럼 대한민국에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빛도 없고, 간다고 한들 그곳의 삶조차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충심은 하룻밤동안 현실과의 타협을 갈등하며 집안을 방황한다. 그리고 그녀는 죽어가는 화분들 속에 꿋꿋이 살아남은 식물처럼 끝까지 위신을 지키며 한번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

 

 

슬픈 처지를 극복한 <플라멩코의 소녀> 정혜        

 

 

 영화를 보면서 왜 플라멩코였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감독님과의 대화에서 플라멩코가 안달루시아 지방 사람들의 집시의 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플라멩코는 집시처럼 방랑하는 정혜의 삶과 마음의 표현이었다. 모의 면접에서 자기소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편의점 사장 앞에서 한 마디 대꾸도 못하는 정혜는 면접관 앞에서 플라멩코를 추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감을 찾는다. 자신을 무조건 끝으로 내몰기만 하는 이 세상과 학교에 ‘나는 나야!’라고 맞서는 것이다.

 

그녀들이 선택한 인생은 더 고달파질 것이고 때론 후회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들의 선택과 도전은 이 시대를 사는 여성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고, 미래의 여성들을 위한 희망임이 분명하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_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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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돌아보는 사람들   Regretters 

 

 

다큐멘터리/ 스웨덴/ 60분

감독 : 마르쿠스 린딘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돌아보는 사람들> 스틸컷

 

"돌이킬 수 없는. 돌아 볼 수밖에 없는"

   

영화는 덴마크에서 1960년대에 처음 성전환 수술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둘은 선천적으로 남성의 신체를 타고 났으며 여성으로 수술했고 다시 남성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 영화가 특이한 점은 둘 다 원래의 성으로 돌아가려는 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중 빨간 옷을 입은 올란드는 다시 남성으로 수술했으며 미카엘은 수술을 앞두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수술대로 들어가는 미카엘이 나온다. 이 영화는 트렌스젠더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담고 있는 내용은 트랜스젠더로 구분 짓기엔 한정적이다.  그들은 트랜스젠더라는 성의 구분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을 시대에 수술한 자들로써 어디에도 소속된 성을 느끼지 못한다. 요즘 생각하는 트랜스젠더의 개념은 흔히 몸과 자신의 성이 맞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들은 다르다.

 

미카엘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폭력 아래에 자라왔다. 때문에 자신에 나약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자신의 남성답지 않음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함을 느낀다. 사실 그가 바라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다운 남자로 인정받는 것, 자신의 나약함이 수용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 그는 놀림을 받거나 맞는 것이 미카엘로서의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카엘라로 자주 분한다. 미카엘라로 분한 그는 어디에서도 사교적이며 수용 받는다 그리고 폭력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미카엘라로써의 삶은 미카엘 자신이라고 할 수 없다.

 

여자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다시 그는 노력을 한다. 미카엘일때 남성답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미카엘라로써도 여성답기위해 노력해야한다.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위해 남장 여자 클럽에서 도움을 받고, 가발을 쓰는 등 완벽하게 미카엘라로써 변한다. 그래도 그가 미카엘라로써 삶을 택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 여성으로써의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수용'이 필요했다. 한 번의 성전환 수술 후 눈을 뜬 후 그는 없어진 페니스를 보고 공황상태에 빠진다. 의사가 나에게 한번이라도 "당신의 선택에 확신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으면 어땠을까? 그는 돌아오지 않는 과거를 곱씹는다.사람들은 위로하는 듯 그에게 말했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어." 하지만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위로'가 아닌 '지옥'이었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돌아보는 사람들> 스틸컷

 

"규정되지 못한 사람들"

 

올란도는 동성애가 불법인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공원에서 할아버지들에게 몸을 팔고 경찰관들에게 욕을 먹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자의 삶을 택했다고 말한다. 여자로 수술한 그는 누가 봐도 고운 선과 외모를 지닌 여성으로 태어난다. 잡지에 모델로 실리기도 했으며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할 필요없이 여성으로써의 삶을 산다. 다시 태어난 그녀의 이름은 '이사도라''이사도라 던컨'의 이름을 빌렸다. 그녀는 무도회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그리고 결혼에 골인해 11년간의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물론 자신이 과거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미카엘은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에 대해 미카엘은 이야기하지만 올란도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잘라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면 당신은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올라도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사랑받고 싶기 위해 새 삶을 선택한 그에게 사랑을 깨는 것은 금기와도 같았다.

 

남편은 그가 과거 남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혼생활은 막을 내린다. 올란도는 말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아니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는 11년간 함께 일 수 있엇다고. 과거 남편을 이야기 하는 올란도의 입가에 번진 미소는 아직도 그 사랑 속에 녹아있는듯 황홀해보인다. 올란도는 자신의 신체를 부정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마카엘에 말에도 단호하게 그것을 반박한다. 올란도는 삶을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사랑한다. 그는 여성임을 원한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사랑되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 남성으로 수술한 후에도 그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차림으로 주위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남성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확고히 말하는 미카엘에게 올란도는 말한다. "나는 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아직도 알 수 없다." 여성의 삶과 남성의 삶을 동시에 경험한 그들은 자신이 확고히 남성이지 여성인지 자신하지 않는다. 도리어 어느 쪽이 더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지에 대해 논한다.

   

그들은 아직도 어느 성에도 규정되지 못했고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되묻는다. 나는 어떤 성을 가졌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내가 어떠한 노력을 해야하는 지. 이러한 물음에서 나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올란도는 스스로 규정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고 미카엘은 이런 나 자신을 받아들여줄 사랑을 아직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계속적으로 들리는 메세지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라는 것이다. 어떠한 규정된 규범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놀림당하지 않고 부정당하지 않는 삶 그 자체를 그들은 갈망한다.

 

 

영화를 보면서 끊임 없이 나는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들의 아픔 중에 내가 박은 못은 없었는지.

 

'돌아보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은 두 사람의 지난 과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살아온 시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 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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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아버지의 이메일 리뷰 - 시선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아버지의 이메일> 스틸컷

 

 술만 먹으면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술이 원수라는 어머니,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맞고 도망나간 언니, 보다 못해 아버지를 밀친 나와 남동생, 맞고 나서도 다음 날 아침은 꼭 차려주어야 도리라고 생각하는 어머니. 누군가에게는 늘 똑같은 레퍼토리의 진부한 가정폭력 일화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혹은 현재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 3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 ‘ 3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홍재희 감독의 <아버지의 이메일>은 그녀의 아버지가 죽기 직전 딸(홍재희 감독)에게 보낸 47편의 이메일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일생을,가족사를 담담하게 그려낸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는 아버지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직접 쓴 이메일과 어머니, 언니, 남동생을 비롯한 일가친척들, 이웃사촌들의 증언을 가감 없이, 함께 전달하는 내러티브 방식을 통해 아버지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 가족 문제를 당사자의 시선과  3의 시선으로 모두 담아내고 있다.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아버지의 이메일> 스틸컷

 

 바로 이 지점에서 홍재희 감독의 탁월함이 드러난다. 엄마와 언니에게서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분노,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가 비친다. 아버지를 회상하며 껄껄 웃기도하고 울기도 하다가 아버지의 폭력, 그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순간 어머니와의 대화는 급격하게 냉각된다. 언니는 아버지에게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다며 애써 아버지를 사소한 존재로 만들고자 시도하지만,카메라 시선을 회피하며 찡그린 얼굴, 짜증 섞인 단호한 말투로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은 먹먹하기만 하다.


김경순(엄마) : 그런 남자하고 산 엄마 인생을 생각하면, 그런 아픈 얘기는 네가 묻어둬도 되지 않느냐 이거야. 난 그냥 그렇게 인정하면서 살았잖아. 여기서 되풀이 하지 마. 가능하면 언니한테도 가슴 아픈 얘기는 하지 않고 갔으면 좋겠어.”

 

 다큐멘터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홍재희 감독은 어머니, 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생전에는 그에 대한 증오만이 가득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그것은 홍재희 감독이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조명하는 계기가 된다. 이는 그녀가 아버지를 매개로 가족의 문제를  3의 시선에서 새롭게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홍재희 : "엄마, 아버지는 성격이 원래 그랬던 걸까, 아니면 아버지가 살았던 환경 때문에 그랬던 걸까?”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자, 그의 인생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와 자신을 앉혀놓고, 다리에 있는 총상을 보여주며 지겹도록 월남한 이야기를 술주정했던 아버지. 어머니를 때리기 전, 오고가는 고함소리에 꼭 들리고는 했던 빨갱이소리. 그는 왜 그렇게 한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사우디로 가려고 했을까?


 아버지가 가족에게 저질렀던 폭력이 아버지의 삶과, 아버지의 삶이 뒤틀린 한국 현대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면서 홍재희 감독은 홍상섭이라는 인간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했던 폭력은 엄마와 언니와 나와 내 동생에게, 심지어는 조카 지우에게까지 응어리를 남겼다. 그것은 아버지가 행한 폭력이었지만 아버지를 매개로 한국 사회가 휘두른 폭력이었다.  3자의 시선에서 보기 시작했을 때에야 가족을 가리고 있던 사회가 보였다. 더 이상 아버지가 휘두른 폭력은 가족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였다.

 

 아버지를 용서한 후에 처음으로 맞이한 아버지의 제삿날, 아버지와 함께 기차타고 황해도 해주에 계시다는 할머니와 고모들을 만나러 가는 꿈을 꾸었다는 홍재희 감독은 어머니와 언니도 아버지 홍상섭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어설픈 화해의 중재를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그것까지도 좋았다. 가정폭력이 남긴 깊은 골과 화해의 가능성, 화해 불가한 현실까지 모두 담아낸 홍재희 감독의 <아버지의 이메일>은 어쩌면 버거울 수 있는 가정폭력이라는 소재를 단연코 입체적으로, 전혀 지치지 않게, 정말 담담히 그려내었다.

 

 


 

 

한국여성의전화 대학생 기자단 2기 김소현(means212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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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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