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뷰어

좀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노력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10. 26. 22:42


좀 더 나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노력


<요한나, 얼음 아래에서> <소녀와 곤돌라> <할미쓰>




 원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세 편의 영화에서 눈여겨 볼 것은 그녀들의 빛나는 의지다. "의지라는 것은 여러 개라도 좋고 하나라도 아예 없어도 좋다 (박판식, <슬픔의 기원>)"는 의미에서 빛난다. 다리를 잃을 뻔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앞지르려는 두려움에 맞서는 요한나, 곤돌라 사공이 되고 싶은 베네치아 소녀 카를라와 인생을 That's so good의 자세로 살아가는 체코의 흥부자 할머니들의 무용단 호르니 르호타.


  한 여자가 새하얀 눈밭을 걸어와 톱질을 하고 얼음 위에 문을 만든다. 문고리가 없는, 심연 같은, 어떤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길을 열어놓은 것 같은 문. 그녀의 두려움은 문을 통과하기 전 무뚝뚝한 표정의 문지기 같다. 


  그러나 요한나는 망설임 없이 얼음 아래로 떨어진다. 


  영상을 보고 있으면 나는 다리를 잃은 것과 맞먹는 상처를 받은 사람 같고 어떤 두려움에 맞서야 할 존재처럼 작아진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요한나의 호흡과 호흡의 사이가 길어지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그녀가 숨을 멎지 않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얼음벽에 부딪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좀 더 자발적으로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그녀를 따라 헤엄치는 것이다.


  어떤 냉대, 혐오와 폭력의 경험, 소리가 통하지 않는 닫힌 문, 꽉 막힌 벽으로도 느껴지는 차가운 얼음 아래에는 자유와 두려움이 공존한다. 요한나는 어떻게 두려움에 갇히지 않고 고통을 이겨내고 천천히 적응해나가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유를 지킬 수 있었을까.


  영화를 결정하는 건 분량이 아니다. 이 짧은 영상 속에서 한 여성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극복하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보여준다.




  여성의 등장, 남성이라는 전통의 종말(?)




  방과 후 또래의 남자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여성 곤돌라 사공을 꿈꾸며 관련 기사를 흥미롭게 읽는 카를라는 평범한 여자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꿈을 꾸는 소녀의 눈은 사려 깊고 “가장 깊은 곳에서 능동적 (이장욱)”이다.


  아빠의 곤돌라 위에서 자기 꿈을 리허설 하고 돌아온 카를라는 군말을 하는 아빠에게 곤돌라가 자신의 곤돌라가 될 때를 위해 연습했다고 어떤 억압이나 자기 단속 없이 털어놓는다. 그러나 단지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앙상한 팔’로는 노를 저을 수 없으며 ‘멍청한’ 생각이라고― 마치 어떤 자족적인 열등감처럼, (900년 가까이 이어져온 남성이라는 전통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분노가 되는 순간, 소녀는 앞뒤 없이 폭력을 받아들여야 만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 두려움과 분노는 왜 여성을 과녁으로 놓는가.


  풀죽어 지내던 카를라는 어느 날, 곤돌라를 타고 내리는 곳에서 여성 사공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흔든다. 소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에게 수줍게 인사를 건네면서 연대를 표하고 지지를 보낸다. 그 뒤로 카를라는 용돈을 받을 때마다 작은 상자에 돈을 모으기 시작하는데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


  요한나가 문을 만들었다면, 카를라는 그 문을 열고 닫고 드나들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쥔 사람이다. 열쇠는 잠긴 문을 열 수도 있고 열린 문을 잠글 수도 있다. 연대와 고립 사이에서 소녀는 열쇠를 구멍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싸우는 일을 해야 한다. 마음을 닫고 갇히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통해 함께 이겨내는 여성으로 자란 카를라의 모습이 그려진다.




  혐오도 비하도 아닌 자기를 인정하는 즐거움




  호르니 르호타 무용단은 어느 날 자기들의 공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문제 해결에 나선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연이 한물갔다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무용단 말고 다른 것’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것’ ‘뭔가 새롭고 강렬한 것’에 대해 골몰한다. 그 결과, 발레 선생을 섭외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상연하기로 하는데.


  여성으로 살다 보면 사회적 분위기에 위축될 때가 많다. 위축되는 마음을 언제나 마음대로 조였다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때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은 자기연민도 혐오도 자책도 비하도 아닌 나 자신을 인정하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요소도 그녀들의 유머가 혐오도 비하도 아닌 자기를 인정하는 즐거움에서 나온다는 데에 있다.


  호르니 르호타 무용단은 생애 첫 발레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관객들은 이 영화를 기대하고 봐도 좋을 것이다. 마음이 따뜻해질 것이 분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