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이야기> 피움톡톡 현장

한국여성의전화 2018. 9. 14. 05:29

<이야기> 피움톡톡 현장


한국여성의전화 8기 기자단 김의정


  9월 13일, CGV 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제12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인 <이야기>의 피움톡톡이 진행됐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가 출연하고 송란희 여성인권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가 진행을 맡았다. 성폭력 피해를 과거에 덮어두었던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자각하며 재맥락화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공유했다. 출연자와 관객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질문과 대답이 되는 시간이었다.



피해자의 이야기는 단 하나가 아니다

  극중 인물이자 실존인물인 감독 제니퍼는 13세 때 있었던 성적학대를 45세가 되어서야 자각했다. 이전까지는 가해자를 첫 경험 상대 또는 첫 번째 남자친구 정도로 여겼다. 제니퍼의 이야기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험에 대한 당사자의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일관된 진술을 반복하기를 요구하며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한 관객은 "우리나라 법조인들과 경찰들이 이 영화를 봐야한다"며, “피해자의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이것을 계속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권김현영은 "피해자가 어느 시점에, 어떻게 해석한 경험을 이야기하든지, 사회는 ‘그것이 가해 행위야. 그 사람이 가해자야’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며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엇이 폭력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으면, 피해자는 경험을 해석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피해자 진술의 변화가 전혀 수용되지 않는 조건에서는 더욱 피해자가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


 

'피해자다움'은 피해를 은폐한다  

  관객들은 <이야기>의 제니퍼처럼 자신이 겪은 피해를 부정했지만, 결국 응어리로 남아있는 상처들을 공유했다. 한 관객은, "내 자신이 피해자인 것을 부정하는 게 사회가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가 정해놓은 특정한 피해자의 모습에 맞지 않으면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납작하게 규정된 피해자의 모습은 '피해'의 영역을 좁힌다. 송란희 프로그래머는, "수사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진짜 피해자가 맞는지 의심을 사고, 무고죄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짚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피해자다움'은, 여성들이 피해를 자각하기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꺼낼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동의 여부'보다 '권력 관계'가 더 중요하다

  <이야기>는 성폭력 가해자가 어떻게 피해자로 하여금 “동의한 성관계”라고 믿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관객들은 ‘사랑이었다’고 믿었으나 지나고 보니 성적 학대였던 경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권김현영은 "이 영화는 피해자가 ‘내 결정’이라고 믿게 만드는 상황들과 온전히 내 결정이 아님을 알고 있는 상대방을 보여줬다”며 그 결정에 대해서는 상대방(가해자)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는 취약한 환경에 놓여있는 어린 여성과, 그것을 알고 이용할 수 있는 위치인 성인 남성의 권력관계가 분명했다. 명백한 권력관계가 보인다는 점에서,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사건도 이야기 되었다. 재판부는 안희정의 위력 행사가 아닌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집중했다. 권김현영은 “위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상상력이 제로”라고 평했다. 그리고 “결정에 있어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고, 가해자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는 상황이라면, ‘결정’ 또는 ‘동의’라는 문제는 굉장히 부차적인 것이 된다”고 말했다. 관객들은 안희정 전 지사의 위력 행사도 인정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권력관계가 선명히 보이지 않는 관계에서의 피해는 더욱 말해지기 어려운 현실을 가슴아파했다.


피해 경험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의 가족, 남자친구, 경찰 등 주변 인물들이 모두 ‘제니퍼는 피해자이고 가해자는 처벌받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권김현영은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식과 제도”라며 이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모두가 무엇이 가해인지 알고 있고, 나는 피해를 고백하기만 하면 되는 사회는 우리에게 아직 멀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을 재맥락화하고 그것을 말하는 과정이 계속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가 조금씩 쌓인다면, 폭력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날 피움톡톡은 폭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시작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권력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와 그 안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폭넓게 나누었기 때문이다. 송란희 프로그래머는 “<이야기>의 피움톡톡을 준비하며, 아동 성폭행 외에도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권김현영은 “사회 전반적으로 한 인간을 통합적인 존재로 존중하지 않고 착취하고 이용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고 짚었다. 관객들은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폭력들과 그로 인한 상처를 이야기하고, 공감하면서 늦은 시간까지 함께 고민했다. ‘이야기’ 그 자체이자,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다져나가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