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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 온 에어 / MJ] 여자어 : 그녀들이 타인과 대화하는 방법

한국여성의전화 2013. 11. 7. 22:35

여자어: 그녀들이 타인과 대화하는 방법



 '여자어'라는 말이 있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단어이다. 한 네티즌이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여자들의 단어를 사전으로 정리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 사전에 나온 일명 '여자어'들의 정의가 모든 여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니 정답은 아니다손 치더라도, 확실히 한 개인에게(여자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가 있는 건 맞다. 저마다 각자의 사전을 가지고 타인과 대화한다. 세상과 소통한다.


 라즈와 예민, 민지. 오늘 내가 스크린을 통해 본 여자들이다. 한 명은 트랜스젠더이고, 두 명은 여중생이다. '여자'라는 성별 말고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한 회차에 상영되도록 묶은 기준을 알 수 없었다. 극장의 불이 꺼지고 한 시간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이 여자들, 자기만의 '여자어'로 세상과 대화하고 있구나.

 

 



라즈 온 에어 (RAZ on Air, 2012)  - 이옥섭 감독


 

 

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라즈온에어>

 

 

 여기 부스스한 금발 머리에 풍성한 속눈썹을 깜박이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라즈. 실시간 인터넷 개인 방송 '아프리카'의 베스트 BJ로 활동 중이다. 그녀는 채팅창을 훑어보며 자신의 외모를 비난하는 글들을 소리 내어 읽더니 마이크에 대고 시원하게 욕을 날려준다. 카메라에 대고 세 번째 손가락을 올려주는 것은 서비스다. 라즈는 매 방송마다 다소 무례한 시청자들을 마주하고, 그럴 때마다 그녀 역시 지지 않고 소리친다. "XX!"


 라즈의 '당당한 방송' 게시판이 욕설로 도배되는 이유는 그녀가 사람들에게 '여자'이기 이전에 '트렌스젠더'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라즈는 트랜스젠더이다. 라즈는 길거리에 나가서도 "괴물이다"라고 소리치는 남학생들을 마주친다. 물론 그 아이들 역시 성량 좋은 라즈에게 찰진 욕을 얻어 듣는다.


 라즈가 세상과 이야기하는 방법은 그렇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을 '멧돼지'라 부르는 시청자에게는 "넌 X돼지"라고 한 방 먹여준다. 그래 놓고는 여자다운 게 뭐냐면서 보아의 'Girls on top'를 따라 부른다. "모두가 나에게 여자다운 것을 강요해" 라즈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속눈썹을 깜박이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다 "웃겨, 진짜."


 라즈는 이미 여자이므로, 화장을 하지 않으면 민낯으로는 밖을 나갈 수 없는, 반짝이고 예쁜 액세서리를 보면 지름신의 유혹을 받는, 훈훈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보려고 커피를 사는, 그녀의 지인에 의하면 '천생 여자'이므로 굳이 여자다운 척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트랜스젠더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과 트랜스젠더가 모여 있는 세상 중 어느 한 곳에 속하는 길 대신, 아프리카 방송국에 자신이 만든 '당당한 세상'에서 그녀만의 거칠고 통쾌한 언어로 여전히 대화중이다.

 

 

MJ (2013)  - 김희진 감독


 

 

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MJ>

 

 

 

 
 이번에는 여중생들의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유리처럼 민감하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사춘기를 겪고 있다. 예민과 민지. 술을 마시고 피터지게 싸우면서도 다음 날이면 결국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두 아버지의 딸들이다.


 민지의 아버지가 예민의 집을 찾아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다음 날, 예민은 그를 찾아가 자신의 교복을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빨랫줄에 걸어놓은 교복이 사라진 건 분명 술에 취한 민지 아버지의 소행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나 오히려 그는 예민의 아버지에게서 맞은 상처를 보여주며 화를 낸다. 이 광경을 민지가 지켜본다.


 민지는 예민이에게 말을 거는 대신 아버지에게 "술 먹고 또 뭘 했냐"라고 묻는다. 아버지가 대답을 해주지 않고 사라지자 민지는 고개를 숙인다. 다음날, 예민은 집 앞에 놓인 교복을 발견한다. 민지의 아버지가 범인이 맞았구나, 예민은 돌려받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간다. 그러나 예민은 교복을 다시 되돌려 받는다. 교복을 훔쳐간 범인은 매일 밤 계속되는 소란에 화가 난 3층 오빠였던 것.


 진짜 자신의 교복을 입고 예민은 이른 새벽 학교에 간다. 그곳에서 예민은 체육복을 입고 높은 교문을 넘는 민지를 발견한다. 예민은 민지를 찾아가 싸들고 온 교복을 건네며 네 것이냐고 묻고, 민지는 치마를 꺼내 검은 실로 새긴 자신의 이니셜 'MJ'를 보여준다. 예민이 왜 그랬냐고 묻자 민지는 또 "그냥"이라고 말한다. 예민은 수업이 끝난 후 민지의 교복치마를 짧게 줄여준다.


 예민과 민지는 서로에게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고 감정을 전한다. 민지는 아버지가 교복을 가져간 거라 생각하고 이를 '그냥 자신의 교복을 주는 것'으로 대신했고, 예민은 그런 민지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교복 치마를 예쁘게(자신의 기준에서) 줄여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그 누구라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시큰하게 만든 민지의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예민과 함께 술에 취한 아버지를 부축하여 계단을 오르던 민지가 멈춰 선다. 민지를 바라보던 예민은 왜 우느냐고 묻는다. 민지는 "너무 무겁다"라고 대답한다. 민지를 무겁게 누른 건, 술에 취해 온몸의 힘이 풀린 아버지의 몸무게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예민과 민지는 등교를 같이 한다. 어제 인터넷에서 본 웃긴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할 거고, 옆 반 친구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같은 걸 주고받을 것이다. 아이들이 주고받는 대화 중에 아직은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아직은 마음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니까. 그게 사춘기 여학생들의 대화하는 방법이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_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