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나의 노래를 허하라" :  자유와 변혁을 위한 이란 여성들의 외침


[2015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고백의 방향' ③] <해방의 노래>


구기연_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해방의 노래> 스틸컷
ⓒ Chaz Productions




1979년 이슬람 혁명은 이란의 모든 문화지형도를 바꿔놓았다.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의 9세 이상의 모든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히잡을 착용해야만 한다. 국민의 대다수가 시아 무슬림이지만, 히잡의 강제착용에 대한 규범에 대해 이란 내 여성들의 의견은 다양하게 표출된다. 그렇지만 현재 이란 사회에서 히잡의 착용은 선택할 수 없는 규정이며 착용하지 않거나, 올바르게 착용하지 않는 경우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2014년 영국에 거주하는 이란인 저널리스트 마시 알리네자드에 의해 처음 시작된 페이스북 페이지 '나의 은밀한 자유(My Stealthy Freedom)'는 2015년 8월 현재 85만 개의 '좋아요'를 받고 있으며 이란 국내외로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미 이란 국내의 여성들은 페이스북 접근이 공식적으로는 차단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페이지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적극적인 가담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 변화의 흐름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페이지에서는 이란의 강제적인 히잡 정책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최근 여성 가수의 노래에 대한 보수적인 성직자들의 '하람(haram/금지)'라는 판결을 둘러싸고 '나의 금지된 노래(My forbidden Song)'라는 해시태그(hashtag)가 달린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렇듯 이란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복장과 히잡 착용 여부를 선택할 수 없게 됐다. 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주었던 여성 가수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도 사라져 버렸다. 이란에서,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금지된 것이다. 

이슬람 혁명 전후로 수많은 이란의 여자 가수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였고, 이란 국내에 머물렀던 여자 가수들은 다시는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여성 솔로 가수의 목소리는 그것이 가진 정체성 때문에 성적 자극을 주는 '위험한 금기'가 되어버렸다.

테헤란 거리 위의 사자들

기사 관련 사진
▲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해방의 노래> 스틸컷
ⓒ Chaz Productions




<해방의 노래>에서 사라 나자피는 이 사라져 가는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시키고 싶어 한다. 근대 이란 여성 가수로서 처음으로 베일을 벗고 공연을 했던 가마르(Qamar)의 발자취를 통해 사라 나자피는 테헤란에서 여성 가수의 목소리가 부활하기를 꿈꾼다.

이러한 목적으로 공연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2009년에 있었던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 녹색의 거리에서 한 무리의 사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 땅의 여성들입니다." 이 말은 2009년 11월, 테헤란의 커피숍에서, 한 지식인 남성이 나에게 건넨 말이다.

2009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맞선 이란의 대중들 속에서, 수백만의 거리 침묵시위 속에서, 격렬한 탄압의 현장에서 사라 나자피는 다른 수많은 그 땅의 젊은이들처럼 절망과 위험에 빠졌다. 이란의 녹색 물결의 민주화 시위대 속에서 사라는 다름 아님 음악으로 저항할 결심을 한다.

나 역시도 2009년 그 뜨거운 테헤란의 거리에서 녹색 히잡을 쓰고, 녹색 팔찌를 끼고 변화와 자유를 목놓아 외쳤던 이란의 여성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00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지 정확히 30년 만에 이란의 젊은이들은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회의 변혁과 희망을 부르짖었지만, "봄은 다시 찾아 왔지만, 네다(2009년 민주화 시위 당시 무장괴한의 총에 맞고 사망한 이란 민주화 시위의 상징)는 사라졌다!"는 영화 속 그들의 외침처럼 무력 진압 앞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또다시 잃어야만 했다. 하지만 2009년 이란의 거리에서 사자처럼 포효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수백, 수천 명의 여성들은 아직도 그 뜨거웠던 사회 변혁을 위한 희망들을 기억하고 있다.

정부가 여성들의 목소리와 노래를 위험한 것으로 치부하면 할수록 이란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여성의 음악과 목소리로 '나'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로써 그들에게 음악은 저항의 도구가 되고 해방에 대한 외침이 되는 것이다. 정권에서 여성의 음악을 탄압하면 탄압할수록 음악은 더욱더 예술영역이 아닌 강력한 정치적 힘이 되어버린 것이다.

목소리에 담긴 힘

기사 관련 사진
▲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해방의 노래> 스틸컷
ⓒ Chaz Productions

관련사진보기


통제와 금지가 일상이 되어버린 이란이슬람공화국에서 여성들은 변화와 자유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전통주의자들과 정부 정권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사회에서 배제하고, 합창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의 색을 지워버릴수록, 이란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여성청중뿐 아니라 모든 청중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담아내고자 한다.

"목소리는 다른 어떤 악기보다 중요하다. 노래만큼 사람의 감정-슬픔, 기쁨, 두려움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악기도 없다"는 영화 속 한 여성의 속삭임처럼 이란의 여성들은 자신의 색을 드러내고자 한다. 어쩌면 인간이기에 너무나 당연한 욕구라 할 수 있는, 바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열망이다.

바로 여기서 이슬람 정권에서 그토록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합창이 아닌 여성 솔로의 노래에는 개인의 정체성이 담겨 있으며 동시에 개인의 감정이 그대로 표현된다.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그 목소리의 색을 희석시키는 것은 마치 이슬람 정권이 부여한 수많은 세세한 규율과 틀 속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무채색을 강조하고 혹은 똑같은 짙은 색의 히잡을 씌워 '나'의 색을 없애는 것과 다름없다. 

보수적인 시선들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오늘날 이란의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것이, 나아가 이란 사회의 변혁에 대한 요구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가지는 감정과 개성을 억제해 그 개인의 목소리를 없애는 것은 마치 자유로운 새를 새장 안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코 죽지 않는 목소리

나는 이란의 거실에서, 공원에서, 결혼식장에서 페르시아의 시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여성들의 수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국영 방송이나 거리, 혹은 공연장에서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은밀하고, 안전한 '그들만의 공간'에서만 엿들을 수 있다. 그들이 노래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위함도 아니며, 정권을 전복시키자는 것도 아니며, 어떠한 정치적 의도가 녹아들어 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노래'를 하고 싶을 뿐이다. 이란 사람들은 그 어떤 민족보다도 시를 사랑하며, 그 어떤 민족보다도 음악을 즐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음악은, 특히 여성의 노래는 반이슬람적인 것이요, 사탄의 목소리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이란 사람들은 불법위성채널을 통해 이슬람 혁명 이전에 활동했던 가수들의 노래를 숨어서, 그들의 거실에서만 즐겨 듣는다. 이슬람 혁명 이전 활동했던 가수들의 옛 노래들은 그래서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란의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 활동했던 여자 가수들의 40년 가까이 지난 오래된 노래들을 여전히 찾아서 듣고, 그들의 새로운 팬이 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또한 비행기까지 타고 인근 국가에서 열리는 여가수 구구쉬(Googoosh)의 공연장을 가득 메우고 그녀의 목소리에 열광하는 이란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그들이 뜨거운 감성을 열망하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공연장에 보인 사람들의 마음과 튀니지의 광장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노래했던 튀니지 가수 에멜 마스루히(Emel Mathluthi)의 노래 "MY Word is Free"의 가사를 다시 되새겨 보자.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다. 나는 절대 죽지 않는 비밀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 목소리이다. 나는 혼란 속의 의미이다... 나는 암흑 속에서 빛나는 별이다. 나는 압제자의 목 안의 왕좌이다. 나는 불에 맞서는 바람이다. 나는 잊혀지지 않는 영혼이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 목소리이다." 

아무리 전통, 보수주의자들이 그녀들의 목을 죄고, 그녀들의 노래를 남성을 유혹하는 사탄의 목소리, 혹은 마치 벗은 몸이라 탄압하지만 이란 여성들은 결코 죽지 않는 비밀, 절대 포기 하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자들이다. 그녀들에게, 자유롭게 노래함을 허하라!

www.fiwom.org

해방의 노래 No Land's Song
아얏트 나자피 Ayat Najafi
2014 | Documentary | 92' | France, Germany, Iran
09. 18. Fri. 18:00 7관
09. 20. Sun. 12:00 12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당신과 나의 이야기

[2015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고백의 방향' ①] <리슨> <나의 침묵>



 김홍미리_여성주의 연구활동가


상영시간이 십분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큰 부담 없이 이 영화의 리뷰를 맡았다. 러닝타임이 짧으니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무지함이 곧 부끄러움으로 돌아왔다. 

영화 <리슨>과 <나의 침묵>은 10여 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담아야 할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할 만큼 충분하고 벅찬 영화다. 숨 막히고 답답한 그 시간을 '무력하게' 견디는 사이 폭력은 관객들에게 그 존재감을 온몸으로 전달한다. 영화를 '보기만'할 뿐, 화면 속으로 들어가 '진실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쫌! 뭐라도 좀 해봐'를 외칠 수도 없는 관객들은 속이 까맣게 탄다.

기사 관련 사진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리슨> 스틸컷
ⓒ 한국여성의전화

그녀의 고통은 전달되었다

타인의 고통은 묘하게도 말이 아닌 몸으로 전해진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바로 타인의 고통이다. 비록 전해 받은 고통이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해 왜곡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왜곡의 가능성이 타인의 고통을 부인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며 언어는 그런 많은 방식 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표정, 몸짓, 눈빛, 눈물, 질병, 습관 등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갇혀있는 몸의 소리들이다. '즐겁다'라는 말을 내뱉기 전에 몸은 이미 즐거움을 말하며, 통역사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입으로 하는 말과 달리 몸이 하는 말에는 번역기가 필요 없다. 통역자의 농간에도 불구하고, 지켜보고 있던 경찰이 부르카를 쓴 여인의 호소를 알아챈 건 부르카 여인의 목소리와 몸짓이 고통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카에 가려져 그녀의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그녀의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목소리와 몸짓은 그녀의 고통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언뜻 보기에 영화는 여인의 말을 통편집하는 통역자를 비난하는 것 같지만, 통역 없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들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이 영화가 전하는 중대한 메시지다. 통역 없이도 피해자의 호소는 감지 가능하지만, 이것을 고의로 기각하는 권력의 작동방식이 매우 다채로워서 그것을 '듣는' 일에는 훨씬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이다. 

엄마의 고통을 지켜본 아들, 그걸 전해 들은 통역자,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알아채는 경찰. 그들에게 부르카 여인의 고통은 이미 '전해졌다'. 그런데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위치를 알리고, 통역자는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며, 경찰은 너무 쉽게 그녀의 도움 요청을 포기한다. 

"전 남편과 전 애인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와서 그녀가 겪은 일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경찰의 대꾸에서 그들이 이미 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집에 갈 준비가 되었다는 통역자의 말을 믿고(싶어) 안도한다. 부르카 여인의 목소리가 커진 것은 그런 그들의 '분위기'에서 자신이 곧 집으로 돌려보내질 것을 감지한 바로 그때였다. 아들, 통역자, 경찰의 선택은 고통에 대한 편의적인 자가진단과 그것에 대한 성급한 봉합이었다. 그들의 성급한 봉합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나의 질문은 들리는 데도 듣지 않는 적극적인 회피인 그곳에 머문다. 

기사 관련 사진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리슨> 스틸컷
ⓒ 한국여성의전화

관련사진보기


피해를 두텁게 만드는 사람들

어쩌면 고통의 그런 속성 (잘 감지되고 외면하기 어려운 속성) 때문에 고통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에 전염될까봐,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될까봐 두려워 타인의 고통에 눈감으려 하고 남의 일이라며 거리 두는 일에 매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아일란 쿠르디의 마지막 모습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나를 무력하게 하는 거대한 힘 앞에서 적절한 내 할 일을 찾지 못한 이들의 적극적인 자기방어일 수도 있겠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이유를 대지 않더라도 종종 우리는 그냥 '무서워서', '가족이니까', '신의 뜻이라서' 폭력과 마주하는 일을 주저한다. 적어도 폭력을 서둘러 봉합하고 외면하고 거부할 만한 이유들이 그것과 대면하고 해석하고 맞서야 하는 이유들보다 많다. 

하지만 폭력의 외부로 자신을 애써 밀어냈던 하루하루는 결국 내가 폭력과 '본의 아니게' 접촉하는 하루하루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본의 아닌' 접촉이란 별다른 해석 없이 움직이는 대로의 폭력-질서에 몸을 싣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와 폭력의 소극적인 만남이 그래서 대체 어떤 일을 하느냐고, 그래서 뭐가 문제냐고 적극적으로 반문하자.)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폭력은 폭력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폭력이 일어나는 그 순간은 피해가 일어나는 나는 시작점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피해를 심화시키고 완성한 건, 피해를 피해로만, 피해자를 피해자로만, 그 상태 그대로 남겨두려는 견고한 침묵의 벽이라는 사실 말이다. 

폭력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 것, 그것을 집안일로 여기는 것, (죽음이 턱 앞에 찬 그 순간까지도) 문제를 사소화하는 것, 그래서 아들인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 혹은 그 문제를 아무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는 것, 경찰도 도무지 복잡해서 피해가고 싶은 것,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는 것,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폭력 이야기에 고민 없이 몸을 싣는 일은 얇아져서 사라질 수도 있는 '피해'들을 더 심각하고 두껍게 만드는 일에 기여한다. 

생각해보자, 폭력-가해가 일어나는 그 순간은 치유가 시작되는 순간이어야 한다. 피해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딛고 일어나야 하는 순간인 거다. 넘어진 사람은 일어나야 하고 옆에 있는 이는 일어나려는 이를 일으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게 옳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넘어진 이들을 주저앉힌다. 

부르카를 두른 여인의 피해는 끔찍한 일을 당했던 그 순간에 시작된다. 피해를 멈추기 위한 그녀의 발화는 종교의 이름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규범의 이름으로 일관되게 삭제됐다. '이맘(이슬람 교단 조직의 지도자)에게 말해준다'는 통역사를 지나, 소란피우지 말라는 경찰의 말을 거쳐, '아버지가 데리러 올 거예요'라는 아들의 말에서 그녀의 피해는 정점을 찍는다. 희망을 품고 있을 때, 피해는 심각하지 않다. 심각한 피해는 그런 희망이 수차례 반복적으로 꺾였을 때 온다. 

기사 관련 사진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나의 침묵> 스틸컷
ⓒ 한국여성의전화

관련사진보기


봉합, 침묵
그리고 너와 나의 고립


'희망'이 꺾인 '심각한 피해'를 영화 <나의 침묵>에서, 그 어머니의 침묵에서 발견한다. 아들의 분노 앞에 무력한 엄마의 6분은 그렇게 흘러간다. (목격자로 연루된 우리가 견뎌내야 할 시간은 불과 6분이다.) 무얼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라 빨래만 만지고 있는 엄마의 6분은 이미 아들의 분노에 장악된 몸으로, 그렇게 이해된다. 아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이전부터 쇼파에 앉아 빨래를 개는 엄마의 눈빛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예측한다. 

영화 속 엄마의 눈빛과 미묘한 움직임에서 아들과 엄마 둘 사이 관계의 역사가 읽힌다. 어머니의 침묵과 어머니의 불안, 어머니의 고립은 그가 폭력-피해를 경험해온 오래된 방식이기도 하다. 아들의 (며느리에 대한) 폭력 앞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녀를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방관자라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가 해왔을 노력을 알 것 같기도 해서, 6분 내내 나는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그녀에게 몰입되었다. 쉽게 폭언이 일어나는 장소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건, 그녀의 몸이 '그렇게는 움직일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여왔기 때문이고,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가 많다.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한마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최대한 몸을/목소리를 작게 만들라는 여성들을 향한 사회의 요구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망언, 가정의 행복을 통해 존재를 입증해온 여성의 삶과 그 와중에 맞딱드린 남자/남편/아버지/아들의 폭력은 그것마저도 책임져야 할 주체로 여성/아내/어머니를 호명해왔다. 

폭력을 책임지는 방식은 그녀가 가족을 보살피는 것과 분리될 수 없었다. 가해자를 보살피면서 폭력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 그 위치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채로울 수 없다. 더욱이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자신을 두려워할 것, 그래서 자신의 말에 따를 것, 따르는 것 외에는 행하지 말 것, 맞서지 말고 견딜 것을 요구한다. 가해자의 통제하려는 의지와 가해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사회의 명령 사이에서 피해자가 도달하는 곳은 침묵일 때가 많다. 

아무도 가만히 있으라 말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고 믿어지는 세계에서, '가만히 있었다'는 비난까지 받아야 하는 일은 피해자의 몫이 됐다. '침묵' 덕분에 말이다. 폭언을 '들어주고' 두려움을 견디면서, 가해자를 달래며 살아내는 것 외에 폭력/가해자를 보살피는 '다른' 방법은 무엇일 수 있을까. 

아들이 나간 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며느리는 거실에, 어머니는 조용히 2층으로 향한다. 둘의 공간이 분할되고, 동시에 화면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은 둘의 고립이 가져올 존재의 삭제를 상징하는 것 같아 한없이 슬프다. 거실은 어머니의 과거로, 2층은 며느리의 미래로 이어질지도 모를 그 상황이 갑갑하다. 둘 중에 한 명은 침묵을 깨야만 했다. 어머니가 거실로 향하든, 울던 여인이 2층을 향하든 폭력과 만나는 다른 방법을 감독은 발견했어야 한다. 나는 전하고 싶다. 폭력을 경험하는 '다른' 방식은 분명히 있으며, 그건 둘의 만남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말이다. 

기사 관련 사진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나의 침묵> 스틸컷
ⓒ 한국여성의전화

관련사진보기


이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의 이야기, 당신 곁에선 나의 이야기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폭력에 무관한 줄로 알고 살아가지만, 실은 '우리'는 폭력과 꽤 적극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가정폭력 생존자 레슬리 모건 스테이너가 테드 강연의 마지막에 "강연 내내 여러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거울의 방향을 돌렸듯이, 폭력에 대해 듣고, 말하고, 전하고, 설명하고, 평가하는 한 폭력은 나의 문제가 아닌 게 되기 어렵다. 나의 움직임이 심각한 피해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는지, 아니면 피해를 심화시키기보다 극복 가능한 방향으로 만드는 일에 보탬이 되는지 숙고할 시간이 왔다. 

누군가의 도움 요청을 나는 (그것이 도움 요청임을) 알아차렸는가, 알아차리고 무엇을 했는가, 회유했는가, 침묵했는가, 방법이 없다고 여겨 거리를 두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종종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통해 밝혀지곤 한다. 나의 오래된 침묵은 나에게 그런 고통이 닥쳤을 때 침묵의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제서야 '나'는, 그것이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음을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른다. 너의 곁에 가는 일이 나의 고립을 구조화하는 일임을 알아차리는 일이 그제야 가능할지도 모르는 거다. 

반면에 '너'의 곁에 늘 서 있는 일은 '너'가 내 곁에 있는 공간을 남겨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와줄까?"
"괜찮으시다면요."

이 대화는 두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울렸어야 한다. (너에게) 곁에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으면서, (내가) 곁에 있겠다고 우기지도 않으면서, 너와 나 사이 공간을 열어두는 이 대화는 폭력을 넘나들 수 있는 다른 삶과 다른 관계의 시작을 알린다. 둘이 만날 거라는 걸, 둘은 시작할 거라는 걸, 둘은 달라질 거라는 걸, 피해는 얇아지고 폭력은 그칠 것을 암시한다. 변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말을 쏟아내는 이들의 곁에서, 거실에 주저앉은 이 곁에서 당신과 내가 꺼내야 할 한마디가 바로 이것이어야 하는 이유다.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정보

리슨 Listen
룬가노 니오니, 하미 라메잔 Rungano Nyoni, Hamy Ramezan
2014 | Fiction | 13' | Demark, Finland
09. 17. Thu. 12:00 7관
09. 19. Sat. 18:2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 7관
09. 20. Sun. 16:00 7관

나의 침묵 Silences
헤수스 멘데스 세스떼로 Jesús Méndez Cestero
2013 | Fiction | 10' | Spain
09. 19 Sat. 18:2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 7관
09. 20. Sun. 16:00 7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 <헌팅 그라운드>


글. 정혜윤 (연세대학교 제26대 총여학생회장)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 헌팅 그라운드(The Hunting Ground)는 미국 대학의 성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 헌팅 그라운드에 따르면 미국 여자 대학생 5명 중 1명은 성폭력을 당했다. 남성 성폭력 피해 또한 상대적으로 적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기 피해를 제대로 공론화하는 것조차 어렵다. 자신의 피해에 대한 정당한 해결 내지는 가해자에게 내려질 정당한 처벌을 위해 대학 당국에 자신의 성폭력 사건을 사건화하거나 공론화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대학 당국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무시당한다. 이유는 놀랄 정도로 명쾌하다. 그 대학에 ‘성폭력 사건이 있다’고 말하면 대학의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성폭력은 절대로 우연히, 충동적으로 발생되는 사건이 아니다. 성폭력은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치밀한 계획이나 계산 하에서 발생한다. ‘남학생 클럽’으로 대표되는 남성적 ·성폭력적 문화가 대학 공동체 안에서 교육·전승되는 것이다. 예일대학교 ‘남학생 클럽’ 학생들이 여자 기숙사를 둘러싸고 “아니라고 말하는 건 좋다는 뜻, 좋다는 건 항문섹스도 좋다는 것(No Means Yes, Yes Means Annal)" 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이런 문화를 가진 구성원의 재/생산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단 강간을 연상시키는 그 풍경은 한국에서 96년도에 500여명의 고려대학생들이 이화여대 축제인 이화대동제에서 난동을 부린 풍경과 겹쳐진다. 후에 이 사건은 성폭력으로 명명된다.


<헌팅 그라운드>는 미국 대학의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여성인권영화제가 열리는 한국 대학의 상황을 바라보면 어떨까. ‘남학생 클럽’도 없고, 대학의 기업화가 미국만큼 심각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캠퍼스에서, 과방에서, 강의실에서, 농활에서, 교수의 연구실에서, 대동제 등의 학생 행사나 동아리 행사의 뒷풀이 술자리 등에서 성폭력 사건은 만연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폭력이 ‘예전과 달리’ 지금의 대학 캠퍼스(어쩌면 한국 사회에서까지) 말끔히 소거된 것처럼, 일부의 ‘싸이코’만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벌이는 것처럼 여기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일단 학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얼마나 발생하는지 알려고 해도 통계를 공개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알 수가 없다. 미국 대학과 같은 이유로, 한국 대학도 경영 주체로서 대학 브랜드 이미지를 잘 관리하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2015. 09. 17.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헌팅 그라운드> 피움톡톡




헌팅그라운드에서 주인공들은 힘을 합쳐 운동가 그룹을 만들고 법을 잘 활용해 피해자들의 삶과 대학 사회에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변화는 미국 사회의 변화까지 이끌고 있다. 이들의 운동이 확산되어, 오바마는 2014년 1월 대학 성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국을 돌아보자. 한국의 여성주의 운동의 지평은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가 사회현상으로 대두되며 다시 여성혐오나 여성주의 운동에 주목을 하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통상적으로는 대여섯 명 정도 올까말까 하던 각 대학 여성주의 단위 오픈 세미나에 20,30명이 찾아오는 기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류가 얼마나 지속되고 확산될지 판단하기는 섣부른 측면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과 반성폭력 운동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섣부를지도 모른다.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은 여성과 약자의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한다. 게다가 몰카 문제가 심각해 여성들은 공공화장실이나 대중교통 이용뿐만 아니라, 숨 쉬며 걷는 것조차 두렵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런 자유를 위해 허용되어야할 것은 일부에게 주어지는 무제한의 자유-타인에게 폭력을 행할 자유-가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자유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더 나은 대학 사회와 공동체를 희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있어, 희망은 분명 있다.


영화제 이튿날인 9월 17일,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 권김현영과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 송란희가 함께 한 피움톡톡에서는 출연자뿐 아니라 관객들 모두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연대와 학생, 학부모, 교직원들의 지지가 성폭력 문제 해결에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때로 지치거나 위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나아가며,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계속 이야기한다면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미국 수녀들은 왜 교황청과 싸웠는가?

[2015 제9회여성인권영화제 ‘고백의 방향’ ④] <주님은 페미니스트>


여성인권영화제, 피움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폭력의 현실과 심각성을 알리고 피해자의 생존과 치유를 지지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2006년에 시작된 영화제입니다. '고백의 방향'을 주제로 한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는 어떤 영화, 어떤 이야기,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9월 16일부터 20일까지 서울극장에서 19개국 29편의 영화로 만나게 될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고백의 방향'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기자 말


* 필자 이미영은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입니다.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주님은 페미니스트> 스틸컷



지난 2015년 4월 16일,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교황청과 미국 여성수도자 대표기구인 여성수도자지도자회의(Leadership Conference of Women Religious, 이하 LCWR)가 싸움을 끝내고 화해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 아니 가톨릭 신자라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 대부분의 사람은 그 기사가 무슨 의미인지는커녕 그동안 미국 여성 수도자들이 교황청이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사를 관심 있게 본 이는 한국의 여성 수도자들, 그리고 몇몇 가톨릭 여성신학이나 여성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초청작 <주님은 페미니스트(Radical Grace)>는 ‘버스를 탄 수녀들(Nuns on the bus)’이라는 캠페인에 참여하는 세 수녀, 시몬(Simone Campbell), 진(Jean Hughes), 크리스(Chris Schenk)의 활동을 통해 이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미국 여성 수도자들은 왜 조사를 받았는가?


2009년, 교황청은 미국 여성 수도회의 70~80% 정도가 가입한 대표기구인 LCWR이 심각한 교리적 일탈 등을 보인다는 미국 내외 여러 주교들의 고발에 따라 조사를 시작하였다. 고발자들은 미국 수녀들이 동성애와 피임, 낙태, 여성사제 운동 등 가톨릭교회에서 금지하는 교리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인다며, 이들의 수도 생활이 가톨릭 신앙과 어울리지 않고 교도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4년여에 걸친 조사 이후, 교황청은 2012년부터 미국 주교 3명을 임명해 최대 5년에 걸쳐 LCWR의 전면 개조를 진행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미국 수녀들에 대한 교황청 조사와 제재가 시작된 결정적 계기는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었던 의료보험 시스템 개혁 법안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당시 미국 주교회의는 이 법안이 피임과 낙태를 조장하는 법이라며 반대 의견을 내놓았고, LCWR은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강보험개혁법을 지지하며 주교단과 다른 의견을 공개적으로 내놓았다. 주교단의 결정이 교회의 공식 입장인 가톨릭교회의 제도 안에서, 교도권을 지닌 주교회의와 ‘다른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냈다는 것은 제도로서는 크게 위협을 받는 일이었을 것이다. 왜 수녀들은 주교단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 



수도복을 벗고 사람들 한가운데로 들어간 수녀들


영화는 그 이유를 버스를 탄 수녀 중 한 명인 진 수녀의 활동을 통해 설명한다. 진 수녀는 수도복을 입지 않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위로하고, 출소하는 이들을 도우며, 성인이 되도록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운 교사이기도 하다. 수도복을 입지 않는 이유에 대해 진 수녀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특정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장벽 없는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편견이나 격의 없이 다가올 수 있도록 수도복을 벗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흰색이나 회색 또는 검은색 수도복을 입고 두건을 쓴 수녀의 모습이 일반적이지만, 미국의 수녀들은 대부분 보통 사람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 평상복 차림으로 활동한다. 50년 전 폐막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문을 열고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세상 한가운데서 섬기는 교회가 되겠다고 선포한 것을 실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수도복을 벗은 미국의 수녀들은 목소리 없는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사회의 변화를 요구했고, 존중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일깨워주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지난 40여 년을 미국 수녀들은 정의, 평화, 인권 활동에 앞장서 왔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강보험개혁법이 추진될 때, 교도권과의 대립을 무릅쓰고도 이 법의 제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주님은 페미니스트> 스틸컷



버스를 탄 수녀들, 세상과 교회를 움직이기 시작하다


그러나 이 일로 미국 주교회의와 부딪치면서 교황청 고발과 조사가 시작되자, 수녀들은 당황하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몸 바쳐 온 교회로부터 자신의 활동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실망하고, 가톨릭교회 교리에 어긋난다고 파문될 위기에 직면하면서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녀들은 교회의 제재에 침묵하며 따르기보다는, 이 문제의 발단이 된 미국의 의료보험 시스템 개혁 법안에 대해 알리는 ‘버스를 탄 수녀들’ 캠페인을 시작한다. 사회정의 활동을 하던 시몬 수녀는 버스를 타고 전국을 순회하며, 이 법안이 가톨릭 사회교리의 정신에 부합하다는 사실을 설득하였다. 신자나 비신자 여부를 떠나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버스를 탄 수녀들을 응원하고 격려하였고, 그동안 수녀들이 낮은 곳에서 함께 해주었듯이 교황청 조사로 위기에 처한 수녀들을 지지하며 함께하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종교 분위기 안에서 수녀들이 공공연하게 교도권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모습, 정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두고 한쪽에서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아동 성추행이라는 끔찍한 성범죄를 저지른 사제보다 수녀들이 하는 일이 동성애와 낙태를 조장하기에 더 나쁘다는 한 남성 반대자를 만나고 난 후, 시몬 수녀는 오랫동안 할 말을 잃고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 중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진 수녀는 평생 그리스도교 신앙에 충실하게 살아온 수녀들을 조사하는 교회,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교계제도의 현실을 보며, 현재 가톨릭교회 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과연 이 제도가 옳은 것인지를.


가부장적인 종교 제도에 의문을 품다


한국 사회에서는 천주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한 역사와 전통 덕분에 가톨릭교회를 비교적 진보적인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 유럽이나 미국 사회에서 가톨릭교회는 가장 보수적인 집단 중 하나이다. 이혼, 피임, 낙태, 동성애 등 가정과 성 윤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원칙을 고집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은 세계 주요 종교 중 여성 성직자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종교이다. 


크리스 수녀는 이 제도가 과연 예수의 정신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질문하며, 가톨릭 교회의 역사적 중심지인 로마로 떠난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여성들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직분으로 봉사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크리스 수녀는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었고 초대 교회의 신앙인들은 그 정신을 올곧이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간 로마에서 새 교황의 선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삼은 첫 번째 교황의 선출은 미국 수녀들 앞에 놓인 미래에 희망의 징표로 여겨졌다. 실제로 교황청은 2014년 말, 미국 여성수도회와의 대화를 통해 귀를 기울이는 걸 배울 수 있었다며 LCWR의 입장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올해 4월, LCWR에 대한 미국 주교단의 조처를 마무리하도록 한 것이다.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주님은 페미니스트> 포스터



끝나지 않은 여정


싸움은 끝났다. 건강보험개혁법도 통과되었고, 미국 주교단의 감독도 끝났다. 그러나 수녀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전처럼 가난한 이들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가 살 것이지만, 가톨릭교회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수녀들은 지난 40년 동안 가난한 이들 한가운데서 이들을 보살피고 돌보면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그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역시 평등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가를 질문하게 했다. 그것은 과격한(radical) 것이지만, 은총(grace)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사실, ‘주님은 페미니스트’라는 제목보다 원제의 ‘래디컬 그레이스’가 더 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잘 담아낸다고 보인다. 래디컬(radical)이란 말은 ‘급진적’이란 뜻뿐만 아니라 ‘근본적’이라는 뜻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예수의 복음 정신은 결코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이들, 여성들에게 더 열린 신앙이었다. 그 근본적인 정신으로 돌아가는 노력은 현재의 교계제도에 질문을 던지고, 설득하고, 함께 바꿔나가야 할 일이라 과격하지만,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은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득 지금의 한국 천주교회 현실을 떠올려보게 된다. 급진적인 저항은커녕 여성에 대한 이야기조차 사라진 오늘의 현실에서, 이 영화가 어떤 울림을 전할 수 있을까? 2015년은 가톨릭교회가 ‘봉헌생활의 해’로 보내면서, 우리 시대의 수도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폐막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 특히 여성수도자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지금 우리 시대의 수도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톨릭교회 안에서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지, 공의회 정신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끝>


주님은 페미니스트 Radical Grace 

레베카 패리쉬 Rebecca Parrish

2015 | Documentary | 78' | Italy, USA

09. 17. Thu. 13:2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 7관

09. 20. Sun. 14:00 12관



저작자 표시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온전한 ‘나'로서의 엄마가 되기 위해서

[2015 제9회여성인권영화제  ‘고백의 방향’ ①]  픽션 다큐멘터리 <10개월> 



 글쓴이_갱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10개월> 스틸컷



출산은 ‘나'로서의 끝인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과정인 걸까. 친정엄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후자라고 이야기해주었지만, 소중한 이들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나의 두려움은 늘 전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기였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임신이 어려운 편에 속했고, 그 때문에 파트너와 난임 클리닉을 오가며 임신을 기다렸다. 물론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을 때 기뻤고 행복했으나, 확실히 오랜 시간 공들여 아기를 맞을 준비를 했다고 해서 임신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10개월>의 주인공인 올리비아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의 상황을 불안해하고 힘겨워한다고 해서 그녀가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불안감에는 묘한 죄책감이 깃든다. 아기를 뱃속에 두고 나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이, 엄마로서 결코 느껴서는 안 되는 불경함 같았기 때문이다. 불안감과 죄책감 사이에서 나는 안정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히스테릭해졌다. 올리비아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거동을 극히 삼가야 하는 산모였기에, 근 두 달간을 밖에 나가지 못하면서는 점점 우울함에 빠져들었다.


그런 때에는 “아기를 위해 견뎌야지." 혹은 “지금은 아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지.” 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어쩌고, 아기만?” 이라는 말이 울컥 올라왔으나, 그 말을 목구멍 밖으로 뱉었던 건 겨우 한 번이었다. 고작 한 번이었지만, 내 말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고 당황한 사람들은 에둘러 이렇게 얘기해주었다. “아기가 곧 너지. 아기 생각하라는 게 너를 생각하라는거지 뭐.”



나에게 허락된 것들


그들의 말은 오래 마음속에 남아 내 마음을 휘저었다. ‘아기가 곧 나’라는 말에는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내 안에 그만큼이나 모성이 없는 걸까 싶어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아직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살결 하나 만져보지 못한 아기를 단지 배 속에 있다는 추상적인 느낌만으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건 너무 과한 요구가 아닐까.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10개월> 스틸컷



집에 머무르는 올리비아의 시선은 늘 테라스 바깥을 향한다. 그러나 그녀가 바깥을 바라보더라도, 늘 같은 장소, 같은 시선일 뿐이다. 다른 각도로 바깥을 바라볼 수조차 없다. 그저 하나의 앵글만이 그녀에게 허락된 최대의 시선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말동무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오직 파트너 한 사람뿐이다. 임신부 카페에 가입해보면 알겠지만, 많은 임신부가 이 시간을 힘겨워한다. 밖을 원활히 나갈 수 있었고, 이야기를 나눌 동료가 있었으며, 해야 할 일들이 있었던 시간과 강제로 분리되어 홀로 집에 남겨졌을 때 그녀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기껏해야 ‘태교 바느질', ‘태교 음악 감상', ‘태교 영화' 정도가 있을 뿐이다. 많은 임신부가 자신을 ‘남편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강아지'라고 표현한다. 올리비아도 이 시간을 끔찍이 힘들어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이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건 응당 그녀 혼자의 몫인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올리비아에게 친구들이 꽃을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축하의 의미였겠지만, 올리비아의 시선으로는 그것이 관에 누웠을 때 사람들이 다가와 추모의 꽃을 바치는 것과 유사하게 그려진다. 그들이 알게 모르게 강요하는 모성성은 한편으로 올리비아라는 자아에 고하는 사형 선고인 것이다.


임신부에게 정말 필요한 것


그러므로 임신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태교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나'와 앞으로 생겨날 엄마라는 정체성, 그리고 아기에 대한 관계성을 사유하는 일이다. 모성이라는 단어는 이 복잡한 문제를 너무나 쉽게 하나로 봉합해 버린다. 생각해보라. 단지 임신을 했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엄마'로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다. 파트너와 연애를 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반려자가 되기 위해 서로를 맞추어 나가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엄마와 아기에게도 그러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건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나는 아직 아기를 낳지 않았고, 따라서 바깥출입이 아직까지 거의 불가능하다. 앉아있는 것조차 할 수 없었기에 늘 누워만 있어야 했다. 누워서 온갖 책들을 읽었지만 배가 불러옴에 따라 그조차도 힘들어졌고, 숨이 가빠져 쉬이 잠들 수조차 없었다. 이 시간 동안 ‘엄마'라는 정체성은 내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통의 시간을 더욱 버겁게 만들어주는 단어일 뿐이었다. 


이런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건 많은 언니들이었다. 언니들은 내 고통에 공감해주었고, 내 고민에도 귀를 기울여주었다. 아기용품을 보내주면서 ‘사실 너의 임신을 축하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서두를 연 한 언니의 편지는 오히려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녀들도 모두 같은 시간을 견뎌냈고, ‘내게 과연 모성이 있는 걸까'라는 의구심과 더불어 가끔 아기가 심하게 보챌 때마다 아기가 미워지게 되는 그녀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해주었다.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10개월> 스틸컷



결국, 엄마가 되어서도 나는 ‘나'다. 엄마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강해지거나,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 호르몬의 영향으로 더욱 불안해지고 강박적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고 설명해주곤 했다. 따라서 임신부는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런 신성성보다는 오히려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보장이 더 필요한,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온 ‘나' 그 자체다. 심리적인 영역에서도 그렇지만, 다시금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사회적 보장 역시 절실하다. 올리비아가 다시 연극 무대에 설 수 있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들이 모여 불안감은 증폭되기에 이른다. 


지금 내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내 아이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언젠간 나와 같은 시간을 겪을 수 있다. 그러면 그때 나는 자신 있게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엄마는 너를 위해 ‘나'를 포기하지 않았노라고, 그러나 너를 사랑하는 것만은 틀림없으며, ‘나'로서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음을 네게 보여주고 싶었노라고 말이다. 


<끝>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정보

10개월 Olmo and the Seagull

페트라 코스타, 레아 글롭 Petra Costa, Lea Glob

2015 | Documentary | 82' | Denmark

09. 17. Thu. 17:30 12관

09. 20. Sun. 13:4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 7관



저작자 표시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사나이’는 울지 않는다

  소년이 태어났을 때 지나가던 악마가 소년의 집에 들어와 말한다. “이 아이가 눈물을 흘리는 날, 죽을 운명이라고”. 부모는 그 말에 따라 소년에게 당부한다. ‘엄마아빠는 우는 아이를 싫어한단다.’ 소년은 왜 부모가 울면 안 된다고 했는지 진짜 이유를 모른 채 울지 않는다. 필사적이다.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도 원하던 일에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도 심지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소년은 울지 않는다.
  그런데, ‘울면 죽는다?’ 다소 황당한 이유가 아닐 수 없지만, 아이가 울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실의 부모들도 남자아이의 눈물을 허용하지 않는다. ‘남자가 왜 울어!’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흔한 말이다. 그 말 앞에 끅끅 거리며 울음을 멈추는 것은 언제나 작은 ‘남자’아이였다. 
그렇다. 그 ‘죽음’의 진짜 의미는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남자(남자다움)’였던 것이다. 
  많은 남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쫓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성성의 상실에 대한 강박은 영화 '쫑'에도 나타난다. 영화 속 두 사내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이너소어(공룡)’에게 쫓긴다. 사내아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친다. 그렇지만 그들의 숨바꼭질은 끝이 없다. 그들을 쫓는 공룡은 어쩌면 강요받는 남성스러움일지도 모른다.


 남자, 약해도 된다

  이 섹션은 ‘남자’이기에 강요되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야기다. 울면 안 되는 남자는 ‘남자다운 것’을 책임이자 의무, 사명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사회적 남성성에 어긋나는 남자는 ‘사나이’가 아닌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남성들의 고통을 조명한다. ‘기집애처럼’ 되지 않기 위한 사나이들의 노력은 어쩌면 거세불안적 공포일는지 모른다.
  왜곡되고 강요된 남성성에 대한 통찰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멈추게 하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왜곡된 남성성은 여성성의 비하와 연동될 뿐 아니라 억압된 남성성을 그릇된 방식으로 표출하는 주요한 대상 역시 많은 경우 여성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호주의 남성 스포츠맨들이 여성폭력을 줄이기 위해 왜곡된 남성성 바로잡기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남자는 파란색으로 상징되거나 대표될 수 없고, 항상 강인할 수만도 없다. 남자도 연약하고 부드럽고 감정적일 수 있다. 제발 억누르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숨 쉴 권리를 남자들에게 허하자.

‘ 가장 좋은 정치는 왕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노자의 말처럼 사회화된 성차가 여성과 남성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을 때 ‘차별’이라는 말도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인권영화제의 거울을 남자에게로 향해보자. 사회가 부여한 ‘성’에 가두어진 내 모습이 매직아이처럼 떠오늘지 모른다.
남자, 그들에게 박탈당한 눈물을 허하자

피움 줌아웃. 하늘색으로 밝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하늘색 벽지를 바르고 자동차 장난감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다. 그래서 피움줌아웃, 진짜사나이의 재구성 섹션의 색으로 하늘색을 선정했다.




쫑 JJONG
남자는 울지 않았다 The Man Did Not Cry
가족오락관 Home Entertainment

10.06. Thu. AM10:30 | 10.08. Sat. PM6:2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

굿바이 보이 Boy
10.05. Wed. PM4:00

원다라_피움족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여기, 한 여자가 있다. 못생긴 외모와 비루한 몸뚱이를 가진 죄로, 22년간 발에 치이는 깡통처럼 살아왔다. 어디선가 분출되는 그녀의 분노와 서글픔을, 우리는 열등감이라 말했다. 하지만 ‘사진 속 그녀’의 주인공 영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았던 것이다. 불쌍하고 역겨움, 혹은 지나친 무관심을 말이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통해 자신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바로 성형이었다.


 가꾸지 않는 여자, 그것은 죄가 아니다

 
한가인의 예쁜 코, 김태희의 큰 눈은 많은 이의 ‘워너비’(이상형)인지 오래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라고 하기에는 외모를 둘러싼 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굴레가 깊고 암울하다. 별다른 고민 없이 예뻐지고 싶은 욕망을 쫒는 동안 나도 모르게 가꾸지 않은 사람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쌓아왔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영희’가 ‘여성’으로서, 혹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 이유를 자신의 “못난” 탓으로 환원하는 것도 외모의 비중을 과도하게 인정해온 우리의 책임이다. 외모는 외모일 뿐, 외모는 그 사람의 1%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눈감는 사회의 책임이다. 
스스로가 차별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앞 다투어 아름다움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바로 이것이 공포다.

  영희는 보았다. 그 억압이 나(여성)를 바라보는 너(사회)의 관음증적인 눈빛임을 말이다. 그리고 너(사회)에 완벽하게 성형한 영정사진으로 회답한다. 삶과 맞바꾼 아름다움은 여성을 향한 문제적 시선을 투과하는 것이며, 어쩌면, 예뻐진 얼굴로 하루라도 사람대접을 받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을 영희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 속 그녀’를 못 알아보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영화를 보는 내내 관심을 둔건 ‘영희의 죽음’이 아니라 ‘영희의 얼굴’이었음에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이제 뚜껑은 열렸다

  남성과 여성을 위계적으로 나누는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엄마의 검딱지’는 모성이 아닌 모성이데올로기만이 강조된 육아의 현장을 담았다. ‘모성’은 엄마의 천부인권이지만, 강요된 모성이데올로기로 인해 억압되고 오염된다. ‘소꿉장난’은 평범한 일상이 놀랍게도 촘촘히 성역할에 근거해서 구성되어 있음을 아이들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아침에’ 가 보여주는 사랑과 폭력과 일상에 대한 통찰은 관객들에게 진정한 공포의 끝을 알려줄 것이다. 
  피움 줌 인 ‘이것이 공포다’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시선의 감시를 통해 행위되고 있음에 서늘해질 것이다. 그것이 이번 섹션을 통해 관객에게 주고 싶은 판도라의 상자, 공포다.

피움줌인. 뜨겁게 핫핑크로 밝히다.

  흔히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색이지만, 이 섹션에서만큼은 나를 여성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에 당당해지라는 의미에서 핫핑크를 골랐다. 사회의 불합리한 시선에 당당하게 맞선 영희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뜨겁게, 더 뜨겁게 ‘핫핑크’로 세상을 밝히자!


아침에 In the Morning
사진 속 그녀 The Woman Who Wasn't There
엄마의 껌딱지 Attached to you
소꿉장난 Just Kid's Play
마마 앤 미미 Mama and Mimi

10.05. Wed. PM12:30 예매하기
| 10.07. Fri. PM8:0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

셰헤라자드, 텔미어스토리 SCHEHERAZADE, Tell Me A Story
10.08. Sat. AM00:00 Midnight | 10.08. Sat. PM8:30


황나리_피움족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Section 3, 그대 마음과 만나 피움>의 영화들은 캄캄한 현실 속에서도 빛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건강한 이야기를 담는다. 현실의 편견과 차별, 폭력을 이겨내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치유하고 성장한다. 그렇게 회복된 생존자들은 개인인 ‘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대’로 나아가 다른 이들을 치유한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이 따스함이 그대의 마음에도 느껴지는가? 연꽃처럼 퍼지는 치유의 온기가 이제 당신의 마음과 만나 꽃을 피운다.


  소개된 다섯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중심보다는 주변이 익숙한 ‘변두리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성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어린 여자아이인데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에, 난민이기 때문에 차별받는다. 사회는 그들을 소수자로 낙인찍고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이 ‘정상’인 사회에서 정상 ‘밖’의 존재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들로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한다. ‘정상이 아닌 존재’들은 마치 검은 차도르를 덮어버리듯 꽁꽁 숨겨지고 침묵 속에 갇힌다. 
  그들을 정상의 범주 안으로 집어넣으려는 시도들은 꾸준히 일어난다. 못생긴 외모는 성형수술을 하는 방법이 있겠다. 성적소수자들은 정신병자이므로 치료가 제안된다.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좋겠고, 난민은 죄인처럼 고개 숙여 살아간다면 수용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등,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편입시키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각각의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고안되었다. 그저 묵묵히 존재‘들’을 인정하기보다 규정하고 잘라내고 편입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물론 정당하지 않다. 정상과 비정상의 잣대는 정해지지 않았고 비정상‘들’을 비난할 권리는 더욱이 누구에게도 부여된 적이 없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세상 속의 차별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맞서 싸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태권이란 소녀>의 사라는 그녀를 억압하는 이슬람 사회를 향해 강한 발차기를 날리고, <Pusing The Elephant>의 로즈는 침묵을 깨고 마이크를 잡는다. 사회가 만든 인위적인 침묵 속에서도 여전히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 외치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피해자에서 생존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회 속 소수자들은 여전히 고통 받고, 아프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이 영화들을 만들었다고 해서 현실이 마술처럼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한 사람이 마술 같은 힘을 만들 수는 있다. 소수자는 연대함으로써 다수가 된다. 그리고 그 다수는 힘을 가지고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때로는 한 편의 책, 한 편의 영화가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이들의 건강한 메시지가 당신의 마음에도 전달되기를 바란다.

섹션3. 연두색으로 밝히다.

  “Section3을 색으로 표현하면 어떤 색이 어울릴까?” 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이 영화들의 색은 차가운 얼음을 깨고 나오는 봄의 빛. 새싹의 색깔, 연둣빛이다.


못난이 Flawed
아웃 인 더 사일런스 Out in the Silence
불온한 젊은 피 Coldblood

10.09. Sun. PM12:30      예매하기

태권이란소녀 Kick in Iran
10.08. Sat. PM4:30  예매하기    | 10.08. Sat. AM00:00 Midnight 예매하기

코끼리 옮기기 Pushing The Elephant
10.05. Wed. PM2:00  예매하기  | 10.07. Fri. PM9:50 예매하기


양승혜_피움족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버거운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안쓰럽지만 아름답다. 

  이 섹션에서는 척박한 여성인권의 현장에서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딴지를 거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부당한 해고의 현장에서, 매 순간 통념과 싸워야 하는 성폭력의 현장에서,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한걸음씩 손잡고 나아간다. 두려움 없이 전진하는 그녀들의 치열한 에너지를 함께 느껴보자. 


 
  섹션2의 영화들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하지만 갑갑함조차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품은 희망 때문일 것이다. 

  <Poster girl>, <빨래>, <권력과 통제, 가정폭력>에서 말하고 싶은 목소리는 ‘투쟁’이다. 싸움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상처를 극복하고 희망을 찾기 위한 처절한 ‘투쟁’ 말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아닌 주체적 여성이 되기 위한 그녀들의 이야기는 아프고 처절하다. 그러나 아프다고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그녀들의 현실과 일상이다. 

  한국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할 ‘동거녀’의 고단한 일상을 담은 <지혜우화>, 인간으로 살 것인가 ‘아내’로서 살 것인가의 귀로에 선 그녀의 이야기 <약속>, 연애에 대한 통념을 깨주는 솔직하고도 발칙한 연애 판타지 <산정호수의 맛>. 이 영화들에서는 촘촘히 둘러싼 ‘통념’이란 공기가 일상에 포진될 때, 근거 없는 편견이 일상을 잠식할 때, 그것이 곧 ‘폭력’이란 이름과 다름없음을 감지할 수 있다. 

  희망을 찾기 위한 그녀들의 ‘투쟁’은 절박하다.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말하고 저항하는 시간은 매 순간 자신과의 싸움과 병행될 터 긴장과 자기의심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이유 있고, 용기 있는 이들의 저항에 우리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간다면 절박함이 마주한 절벽을 조금은 낮출 수 있지 않을까. 용기한줌 쥐어줄 용기가 나에게는 있을 테니 말이다. 


섹션2. 회색으로 밝히다.

  섹션2는 회색과 같다. 어느 색을 섞어도 자기만의 색을 유지할 수 있는 검은색. 본연의 색을 유지하기 위한 그녀들의 치열한 일상은 아직 회색이기 때문이다



포스터 걸 Poster Girl
그녀는 위대하지 않다: 지혜우화 Jihye's Fable
10.09. Sun. AM10:30  예매하기

약속 Promise
산정호수의 맛 Moonwalk
10.09. Sun. PM2:30 감독과의 대화 GV 예매하기

빨래 Resilience
권력과 통제, 가정폭력 Power and Control: Domestic Violence in America
10.06. Thu. PM3:0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예매하기

 

황현하_피움족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