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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구이 다리집><엄마의 사연첩> 가족의 방향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9. 21. 17:24

가족의 방향

― 한국 영화 <생선구이 다리집>

한국 다큐멘터리 <엄마의 사연첩>

 

 

  가족이라는 글씨는 못생겼다.

  자주 안 써보는 글자이기 때문에 예쁘게 쓸 줄 모르는 것이다. 관계는 난로처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말에 감명 받은 적이 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가족이란 너무 가까워서 타버린 존재들일까.

  가족을 몇 번 더 쓴다. 마음에 드는 가족을 쓸 수 있게 된다. 나는 가족을 가족이라고만 말하고 싶다. 가족은 가족이기 때문이고 나 같은 경우엔 덧붙일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가끔 이 사람들이 나의 가족이어서 다행이다 마음이 놓인다고 생각할 때, 이 사람들이 나의 가족인가, 가족이네― 하고 느낄 때 그들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나이프의 칼날과 손잡이

  “불운은 나이프와 같은 것이다. 칼날을 잡으면 손을 베이지만 손잡이를 잡으면 도움이 된다.”「바틀비」의 작가 허먼 멜빌의 문장이다.

 

  확실히 가족은 나이프 같은 면이 있다.

  서로의 칼날을 잡을 때도 손잡이를 잡을 때도 있게 되는 것이다. 김봉주 감독의 <생선구이 다리집>, 고동선 감독의 <엄마의 사연첩>은 잘 모르지만, 가족을 이해한 사람과 이해하려는 사람의 영화다. 가족에 대한 이해는 칼날도 되고 손잡이도 된다. 가족이 가족에 대한 이해를 휘둘러도 될까 하는 생각을, 오춘기(성인이 되어 맞는 제2의 사춘기)를 맞은 나는 이유 없는 반항처럼 종종 해보곤 한다.

  김봉주 감독의 영화 <생선구이 다리집>은 바람을 피워 이혼 당한 재희가 친정어머니 생선구이 ‘다리집’에서 일을 하게 되고 그러던 일상 속에― 사춘기의 아들 은찬이 들어오게 되면서, 대답하기 어렵고 이해받을 준비가 덜 된 인물(재희)과 질문하고 미울 만큼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인물(은찬)이 만나게 되는 영화다.

 

 

  “왜 그랬어?”

  분식집에서, 은찬이 묻는다. “순대가 먹고 싶어서, 너희 아빤 순대 싫어하거든.” 재희가 순대를 찍어먹으면서 하는 대답이다. 이 질문은 다의적이다. 재희에게서 저런 식의 대답이 나온 순간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던 관객들은 질문의 의미를 확장하게 된다.

  음식을 배달하던 은찬이 자신의 가족, 엄마에 대한 타인의 악의적 호기심과 험담에 음식과 돈을 낚아채 돌아오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미 당사자들에게보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고 사실 그 대답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복잡한 마음이었을, 엄마를 찾아온 사춘기 아들에게는 말이다.

  돈 때문이라거나 남자 때문이라거나, 요즘은 이혼한 부부가 이혼인증 사진을 찍어 올리는 등 이혼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을 다르게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이혼 여성’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우리가 여기에서 구별해야 할 것은 ‘일상적인 것’과 ‘사소한 것’이다.

  그 일은 일상적이지만 사소하지 않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각주:1]

  재희의 사회적인 성(性)은 ‘바람 피워서 이혼 당한 여성’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그런 식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이해받아야 할 부분을 그 지점에 한정시킨다. 이해받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색안경의 밀도가 높을수록 이해를 받는 행위는 ‘능동적인 싸움’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은찬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재희의 되받아치는 칼이나 방패가 되어주고 친정엄마 역시 감독의 말처럼 재희의 ‘샌드백’이 되어줌으로써 재희가 능동적으로 싸워나가는 것을 돕는다. “어긋나도 화해가 필요하지 않은 관계”를 담아내고 싶었다는 감독은 샌드백처럼 치고받는 가족의 이야기와 이해의 복잡성, 질문하고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그 대답을 들은 것 같은―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더 정확한 이해와 화해와 사랑이 필요한, 가족의 모습을 김봉주 감독은 <생선구이 다리집>이라는 영화의 이면에 담아두고 있다.

  “생선구이 다리집 은찬이가 자라면 엄마의 사연첩의 아들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진행자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고동선 감독의 다큐멘터리 <엄마의 사연첩>은 3권의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사진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질문을 통해, 이야기하고 대답하고 고백하는 엄마의 입을 통해― 엄마의 사연을 사진첩에 꽂아나가듯 이야기를, 어머니의 일생을 진전시킨다. 감독이자 영상 속에서 엄마의 아들로 등장하는 고동석 감독은 자신이 어머니에게 많이 대들고 닮아가는 부분이 마음에 안 들고 싫고 그랬던 부분을 이해하고 화해하고 싶어서 이 다큐멘터리를 찍게 됐다고 고백했다. 감독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생길지 모르겠는데”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내게 ‘이 다큐멘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생길까요?’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관객들은 사진첩이 한 권 한 권 정리되는 모습을 지켜본다. 어쩌면 영화가 끝나고 이루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 감독이 했던 말처럼, 이 영상은 감독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이해의 과정’인 듯하지만 그 과정이 관객의 내면을 파고들고 있음은 다르게 말할 필요가 없다. 관객 중 한 명이 감독에게 질문했다. 사진첩은 잘 있느냐고. 나는 마치 이 질문이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것도 같고 그의 사연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현재 그 세 권의 사진첩은 잘 보관하고 있고 촬영을 끝내고 보니 울컥하기도 했다”면서 고동선 감독은 영화를 끝낸 뒤 자신의 새로운 감회를 들려줬다. 감독과의 대화를 시작하면서 ‘떨리고 마음이 너무 복잡하다’고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던 감독이 자신이 찍은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왜 때문인지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독과의 대화를 듣는 동안― 내가 그의 능동적인 행위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이해를 그렇게나 가깝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나는 왜 ‘그의 이해를 듣고 있는 중’이라고 느꼈을까.

  글을 나가면서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데, <엄마의 사연첩>에서 엄마의 삶을 단축하는 하나의 버튼처럼 작용한다고 느껴졌던 한 편의 시. 아들이 엄마에게 좋은 기억도 아닌데 사진을 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냐고 묻는 장면에서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이고 추억이라고― 집으로 돌아가서 사진첩을 들춰보고 싶게 만드는 장면인데, 이모 미용실에 붙어 있었다는 푸시킨의 시「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낭송하는 연희 씨의 추억과 사연 담긴 목소리가 생생하다.

  아래에 시를 옮겨 놓는 것으로 다른 말은 대신하기로 한다.

  좀 불손한 생각이지만, 이 순간 영화를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일이 아닌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마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1. 신형철,『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책 제목을 인용.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