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뷰어

침묵을 뚫는 생존자들의 목소리

한국여성의전화 2016. 11. 8. 09:45

침묵을 뚫는 생존자들의 목소리

<침묵을 말하라>


은연지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아내폭력에 관한 통념에 조용히 반기를 들다


1993년 UN이 제정한 ‘여성폭력철폐선언’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이하 여성폭력)을 “공적인 또는 사적인 생활 속에서 일어난 협박, 강요, 임의적인 자유의 박탈을 포함하여 여성에 대한 신체적·성적·심리적 해악이나 고통을 유발하는 또는 유발할 수 있는, 젠더를 기반으로 한 폭력 행위”라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가정에서 여성 배우자에게 행사하는 폭력 또한 여성폭력에 포함된다. 


그러나 사회는 ‘가정은 공적 개입으로부터 보호돼야 한다’는 이유로 아내폭력을 방관해왔다. 피해자들 또한 가정의 유지를 위해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을 체화했다. 방관과 강요된 침묵 속에서 아내폭력은 오랜 기간 계속됐다.


일부 사건이 수면 위에 드러나는 경우, 아내폭력에 무지한 이들은 완전한 자유인의 상황을 가정하고 왜 빨리 도망가지 않았냐고 질책하거나 피해자가 ‘유약하고 무기력한 피해자’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려 든다. 이 상황 속에서 피해자들은 질책으로 입을 상처를 예견하고 입을 다물거나,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침묵하게 된다.


영화 <침묵을 말하라>는 아내폭력을 둘러싼 사회의 침묵과 통념에 조용히 반기를 든다. 영화는 가정 폭력으로부터 생존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들은 남성 배우자로부터 장기간 신체적·심리적 폭력을 당한 피해자이자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배우자를 살해한 살인자다. 영화는 피해를 경험한 이들로부터 폭력의 특수성을 듣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전달한다. 



남편 살해로 내몰린 여성들

 

피해자들은 담담한 어조로 자신들이 남편을 살해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사정을 밝힌다. 이들은 폭력을 행사한 이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남편’이었기에 쉽게 떠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라 벨마는 남편을 사랑했기에 그가 폭력을 행사해도 떠나기 어려웠다. 글렌다는 남편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안타까운 사람’이었기에 그를 홀로 둘 수 없었다. 아이를 제대로 양육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피해자를 붙잡았다. 조앤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왔지만, 거처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도움을 요청할 사회의 제도도 없었다. 인터뷰에 응한 피해자들이 폭력을 경험했던 당시 공권력은 아내폭력의 성격과 심각성에 무지했다.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경찰서장 존 웰터는 90년대 초반까지도 경찰은 가정폭력이 발생한 현장에서 “집안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세요.”라 답했다고 밝혔다.


사회는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을 묵인했다. 그 속에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사회의 침묵 속에서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고, 자신이 살해당할 위험을 직감할 때까지 남편의 폭력을 견뎌야 했다. 출구 없는 폭력 속에서 죽음을 면하기 위해 이들이 택한 것은 남편 살해였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그리고 운동가로


영화 속 아내폭력의 피해자들은 1989년 ‘폭력에 맞서는 여성재소자 모임(Convicted Women against Abuse)’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피해를 공론화하기 시작한다. 피해자들은 폭력의 경험을 털어놓고 다른 이들의 경험을 들으며, 같은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이들에게 ‘내가 경험한 폭력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이들에게 상처를 치유할 힘을 끌어낸다. 이들은 자신을 ‘생존자’로 명명하고 “난 이런 행동을 했지만, 이제는 나아질 거야”를 외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다른 여성들에게 “자신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낼 결정을 내려도 괜찮다”고 외친다.



감독 올리비아 클라우스, 피해생존자 브렌다 클러바인과의 대화




피움톡톡은 감독 올리비아 클라우스 그리고 ‘폭력에 맞서는 여성재소자 모임’의 창시자 브렌다 클러바인과 화상통화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올리비아 감독은 친한 친구의 폭력 피해 경험을 듣고 그녀를 도울 방법을 모색하다 영화를 촬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자신이 영화를 제작할 당시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힘을 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한국에서 상영한 것에 감사를 표했다. 브렌다는 촬영 직전까지 여러 걱정이 들었지만, 촬영의 경험과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힘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었다고 전했다. 


관객들은 폭력의 피해를 직면하고 이겨낸 브렌다에게 여러 조언을 구했다. 한 관객은 자신의 어머니가 아내 폭력의 희생자였지만, 자신이 어머니를 도울 수 없었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브렌다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관객들을 다독였다. 


브렌다는 폭력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많은 관객이 그에게 폭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물었다. 브렌다는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열한 번의 가출을 시도했다. 이 지난한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녀는 “내 안에서 나오는 힘 있는 목소리를 찾았다”고 밝혔다. 또한 브렌다는 “올리비아와 함께한 촬영이 큰 힘이 되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고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폭력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영화 속 아내폭력 피해자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열정은 아내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고정적인 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을 유약한 피해자성에 가두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생존자이자 운동가로 명명한다. 침묵을 뚫고 울리는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영화를 통해 멀리 퍼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