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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제 그건 폭력이라고 말하자

한국여성의전화 2017. 9. 23. 04:11

우리 이제 그건 폭력이라고 말하자

씨네토크 "데이트폭력을 말하다"


윤선혜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9월 22일, 한국여성의전화가 주최하는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데이트폭력, 영화로 말하다’를 주제로 시네 토크가 열렸다. 시네 토크에 앞서 여성 폭력 문제를 다루는 두 영화 <닫힌 문 뒤에는>과 <완전히 안전한>이 상영되었다. <닫힌 문 뒤에는>은 친밀한 관계에서의 여성폭력을 경험한 세 여성의 이야기를, <완전히 안전한>은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데이트폭력과 2차 가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 시네 토크는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의 진행 하에 유화정 젠더학 연구자, 손문숙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활동가, 김재희 변호사, 하진 데이트폭력 피해 당사자가 패널로 참여했다.

아직 한국 사회에는 데이트폭력의 범주에 대한 정확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전화는 데이트폭력을 ‘연인 관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상대에 의해 발생하는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등의 폭력’으로 정의한다. 이때 데이트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이유로 감춰졌던 여성폭력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명명한 것이지 법률적인 개념은 아니다.

여성폭력의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층위의 폭력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가정폭력, 성폭력, 데이트폭력을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데이트폭력은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엄연한 범죄이지만 정신적, 언어적 폭력 등 가시적인 폭력을 관찰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현행법상 처벌 근거가 없다. 물리적 폭력 외의 데이트폭력이 법의 사각지대에 갇혀버린 것이다.

사회적 인식 또한 데이트폭력의 처벌을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다. 데이트폭력 피해 당사자인 하진은 소송 과정에서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었다고 털어놨다. 주위에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 그 후에 이어지는 2차 가해를 견디는 것,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와 판사가 지닌 편견에 맞서는 것까지. 가해자의 곁을 떠났다고 해서 피해자의 고통이 끝나는 건 아니다. 데이트폭력에 관한 사회적인 편견은 피해자를 더욱 움츠러들게 하는 동시에 가해자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손문숙 활동가는 “어디에 가해자 학교가 있는 것 같다”며 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들이 보이는 몇 가지 특징을 설명했다. 가해자들은 폭력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이며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심지어는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 맞을 짓을 했다며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그들은 피해자를 폭행한 뒤에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등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꿔 피해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한편,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유화정 연구자도 ‘가해자 학교’라는 표현에 크게 공감하며, 데이트폭력의 첫 번째 신호로 ‘맨스플레인’을 꼽았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피해자를 훈육의 대상으로, 자신은 피해자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폭력은 훈육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피해자를 폭행한 것은 더 나은 상황을 위한 것이므로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하진은 “가해자들이 절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가해자가 됐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상대방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은 동등한 권력 관계 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다. 따라서 데이트폭력은 애초에 둘 사이에 전제된 젠더 권력 차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한 관객의 질문에서처럼 생물학적 차이에서 오는 권력이 없는 동성 커플의 경우에도 데이트폭력은 발생한다. 애초에 폭력은 다양한 관계 내에서 발생한다. 경제적 위계, 사회적 지위 등에서 비롯되는 권력 관계 또한 폭력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동성 커플을 인정하지 않는 법적, 사회적 인식 탓에 오히려 더 보이지 않는 곳에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으니 일반인과 쉽게 구분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특징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김재희 변호사에 따르면 고소 과정에서 주변인들이 증언하는 가해자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다. “명문대를 나왔다”거나 “집안이 좋다”며 그를 옹호하는 지인들의 탄원서가 쏟아지기도 한다. 가해자가 알코올중독이거나 분노조절 장애일 것이라는 등의 흔한 편견은 변명에 불과하다. 김재희 변호사는 특히 여성폭력 사건 가해자들의 증언에 단골로 등장하는 ‘분노조절 장애’에 의문을 제기한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들만큼 분노 조절을 잘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분노 조절을 피해자에게만 한다.” 한 사람만을 향하는 분노, 그 분노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을 교묘하게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가해자의 특징이다.

데이트폭력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으로 폭력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는 점과 우리 모두 어릴 때부터 이러한 폭력을 ‘사랑’으로 학습한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쟤가 널 좋아해서 괴롭히는 거야”라는 말을 듣고 자란 여성에게 남자의 사랑은 원래 그런 것으로 여겨진다. 여자 주인공의 팔목을 거칠게 잡아끌거나 벽에 밀쳐 강제로 키스하는 드라마 장면을 박력 있고 로맨틱한 것으로 소비하면서 ‘폭력=사랑’이라는 공식은 더욱 견고해진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허물며 미디어와 사회 전체가 데이트폭력 가해자를 길러내는 학교로 기능한다. 거대한 학교 속에서 모든 남성은 개개인의 폭력적 성향과 무관하게 폭력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학습한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데이트폭력은 연인간의 사소한 다툼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무엇일까?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한 관객의 말이 그 답이 될 것이다. 데이트폭력은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사람들만 겪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인 폭력이다. 다만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특징 때문에 쉽게 은폐되어왔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주변 사람들이 그런 일(데이트폭력)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객의 질문과 그 답은 사회적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이정표를 제시한다. 데이트폭력의 존재와 그 의미를 인지하고 내가, 혹은 주변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 때 ‘데이트폭력’이라고 정확하게 명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사적인 일, 사랑싸움이 아니고 분명한 폭력이라고 말하자. 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을 소개해주는 등 실질적인 도움과 더불어 필요하다면 언제든 돕겠다는 신뢰감을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데이트폭력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준 사람이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애정과 증오가 뒤섞인 채 가해자와 다시 연락하거나 만나기도 한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공감하기 어려운 피해자의 태도에 주변 사람들이 인내심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순간 다시 가해자에게 돌아갈 확률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언제든 도움을 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무엇보다 데이트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꺼내기 위해서는 예민함으로 폄하됐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느꼈던 이상하고 불편한 느낌을 좀 더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피해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자. 피해자의 언어가 일상화될 때 데이트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비로소 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