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뉴스

자신만의 속도로 나이 들기

한국여성의전화 2017. 9. 24. 00:00

자신만의 속도로 나이 들기

<미용실 사장님 메이블> <할머니의 운전면허 도전기> 피움톡톡

윤선혜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 4일 차인 9월 23일, ‘나이듦의 다른 얼굴 지혜: 성역할과 나이듦의 틀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주제로 피움톡톡이 열렸다. 정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램팀이 진행을 맡았고, “순수하게 오리지널 싱글로 77년 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애순 작가와 반대로 “저는 남자와도 살아보고 여자와도 살아보고 온갖 것 다 해본 사람”이라는 최현숙 노인구술생애사 작가가 패널로 참여했다. 

피움톡톡에 앞서 상영된 영화는 <미용실 사장님 메이블>과 <할머니의 운전면허 도전기>로 8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두 영화는 기존 미디어에서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던 노년층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최현숙 작가는 “젊은 여성 감독이 여성이자 노인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는 점이 고맙다”며 “그들이 늙어가는 모습이 섬세하게 담겨 있어 좋았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다른 상영작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많은 중·노년층 여성들이 관객석을 메운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짧은 영화 두 편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에게 입체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부족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태 여성 캐릭터들은 이름도 없는 ‘여자시체’거나, 억척스럽고 희생적인 엄마거나, 젊고 아름다운 눈요깃거리로 존재했다. 그러한 미디어 환경에서 여성들은 이름이 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서로 대화를 하고, 그 대화가 남성과 관련된 얘기가 아니어야 한다는 소박한 기준만으로 영화를 평가해야 했다. 그래서 89세의 혈기왕성한 미용사 메이블과 86세의 초보 운전자 테레즈는 낯설고도 반가운 존재다.



소수자성 배제와 바람직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쉬워

하지만 영화의 의의를 인정하는 동시에 최현숙 작가는 소수자성의 배제를 두 영화의 한계로 꼽는다. 사실 메이블과 테레즈는 선진국의 중산층,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이다. 이들보다는 소수자라는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어려움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다큐멘터리로서는 더 중요한 의제일 수 있다는 점이 최현숙 작가의 지적이다. 또한 여전히 머리를 예쁘게 단장하며 젊고 활기차게 늙어가는 두 사람만을 바람직한 노년의 모습으로 규정하는 감독의 시선도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감독의 시선 탓인지 한 관객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질문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일하는 것에는 두 작가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김애순 작가는 “일을 함으로써 희망이 생기고, 수입이 생기고,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며 나이에 상관없이 일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최현숙 작가는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일을 해야만 사람처럼 사는 것이라고 평가하는 관점”에는 반대했다. 장애가 있거나 너무 지쳐서 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나만의 속도를 찾아 건강하게 나이 들기

“한국 사회에서 혼자 늙어가는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객 질문에는 비혼 여성들의 롤모델로 주목받는 김애순 작가가 답했다. 단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견뎌야 했던 김애순 작가는 “늙어서 외로워진다”는 주변의 걱정에 흔들리지 말라고 강조했다. “늙으면 누구나 외롭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얼마든지 스스로 메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혼자서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들 수 있다. 이에 더해 김애순 작가는 여성이 혼자 살아가기 위한 네 가지 조건으로 건강, 경제력, 친구, 이웃집에 사는 친한 친구를 들었다. 

한 관객은 두 작가에게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살다 보면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하다는 압박감에 힘들다고 느낄 때가 있다”는 그는 “잘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지” 질문했다. 이에 최현숙 작가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세상은 계속 돈이 많아야, 젊어야, 친구가 많아야 행복할 것이라고 떠들지만 그런 말은 믿지 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분명히 해야 한다.” 앞서 김애순 작가가 언급했듯이 사회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행복을 알고 따라야 한다. 이것이 두 인생 선배의 조언이었다. 

한 시간 가량의 피움톡톡을 마무리하며 인생의 마지막 목표에 관해 묻자 두 작가 모두 글을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 여성의 롤모델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영화 속 메이블과 테레즈, 그리고 피움톡톡을 함께한 김애순, 최현숙 작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몇 발 앞에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선배들을 따라 우리 모두 자신만의 속도로 늙어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