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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여성은 시민이, 인간이 될 것이다

한국여성의전화 2017. 9. 23. 01:59

결국 여성은 시민이, 인간이 될 것이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폐막작 <거룩한 질서>


정윤하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1789년. 라파예트는 프랑스 혁명 중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한다. 제1조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함을 골자로 한다. 시민사회가 태동하던 시대였지만, 그가 선언한 인간에 여성은 없었다. 인간과 시민은 남성으로 치환됐고 그 권리 또한 남성의 전유였다. 동시대의 여류 작가 올랭프 드 구즈는 이에 반대하며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으나, ‘여성에게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렸다는 죄목’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여성에게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연단 위에 설 수 있는 권리도 누려야 한다.” 올랭프가 남긴 말은 이후 유럽 전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격동시킨 강력한 불씨가 되었다. <거룩한 질서>는 유럽의 마지막 주자로 여성참정권을 도입한 1971년 스위스를 배경으로 한다.

뒷모습이 익숙한, 여성의 헌신

주인공 ‘노라’는 삼대가 모여 사는 집에서 가사를 전담한다. 집안 안팎에서 사람들은 노라를 아끼는 듯하다. 그는 매일 살뜰한 며느리로, 남편을 성실히 내조하는 아내로, 아들들에게는 지혜로운 어머니로 인정받고 있다. 그 집안이 늘 청결을 유지하고 남자들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노라의 덕이다. 부모와 잦은 불화를 겪는 조카딸 ‘한나’도 그와는 말을 섞는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계속된다. 사랑하는 남편 ‘한스’는 파트타임 일자리를 알아보는 노라에게 자신의 허락(permisson) 없이 취직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다. 노라의 시숙 ‘워너’가 딸 한나를 보호소에 보낼 때도 한나의 엄마인 ‘데리스’와 숙모인 노라에게는 이를 막을 권한이 없다. 집안의 문제는 가부장이 결정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이다. 'This is law.'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사회의 관습법 앞에서 노라의 헌신과 재능은 한순간에 무가치한 것이 된다.


여성이 투표할 권리를 얻는다는 것

여성에게 투표용지가 주어진다는 것. 그건 단순히 선거 기간에 할 것이 생기는 것 이상의 일이었다. 투표는 시민이자 인간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공적’으로 존재를 인정받는 상징적 의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짧은 러닝타임에 노라와 그 주변 여성의 서사를 통해 세계 여성사의 격변기를 담아낸다.

17, 18세기 서유럽의 시민혁명이 품고 있던 ‘인간의 자연권’, 그것이 발명한 공공의 영역과 그곳에 참여하는 ‘시민’, 그럼에도 여전한 남성의 독무대. ‘그렇다면 왜 여성에게는 인간의 자연권인,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예견된 역사였을지 모른다. 19세기부터 여성의 교육권, 재산권, 그리고 참정권을 요구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된다. 영화의 배경인 1971년 스위스는 그 모든 파랑의 현장이었다. “Women's Rights are Human's Rights!" 취리히 도심에서 당대 여성인권 의제들이 쏟아져 나오는 집회 장면이 이를 응축한다.


여성이 한 사람으로서의 시민이 되기까지

승리를 예견할 수 있는 영화는 짜릿하다. 인물의 절절한 시련을 마주해도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는, 낙관을 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를 이미 알고 있으니 이 영화도 그러리라 짐작할 수 있겠다. 노라와 그 친구들은 인간으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찾게 될 것이다. 여성도 남성처럼 공적 영역에 진출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박수를 치며 영화관을 빠져나오려는 관객들을 다시 붙잡는다. 승리가 노출된 이후에도 러닝타임이 아직 남아 있다.

오늘날 참정권을 획득한, 남편의 허가 없이도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 수많은 여성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 아직도 여성은 육아와 집안일을 소홀히 하지 않을 의무를 상기하며 일터에 나가고 있다. 성 경험이 많은 여성을 업신여기는 멸칭들이 여전히 무성하다. “애들 잘 챙길 거야.“ 일을 하고 싶다며 남편의 동의를 구하던 노라와, 마을의 잡배들과 난교를 하고 다닌다며 ‘공공자전거’라는 주홍글씨가 붙은 한나는 아직도 현재에 살고 있다.

“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노라는 “난 한 번도 오르가즘에 오른 적 없어!”라고 일갈한다. 언뜻 보면 동문서답일지 모를 대목이지만, 영화의 마지막과도 이어지는 이 장면은 우리가 마저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여성이 꿈꾸는 것은 남성성의 기준에 맞는 시민이 아니다. 공사의 영역이 무너지고 여성이 누군가에게 통제받지 않는 오롯한 한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영화가 끝날 것이다. <거룩한 질서>의 마지막 포커스. 행복에 겨운 노라의 표정이 언젠가 관객에게도 옮겨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