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뷰어

내가 증거다

한국여성의전화 2018. 9. 15. 04:06

내가 증거다


한국여성의전화 8기 기자단 우정

우리가 마음 편히 거리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사법 제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를 피해로부터 지켜주고 가해자는 체포해 격리시키리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밝혀진 현실이 반대라면? 이 거리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것은 강간범이고 피해자는 집에서 나오지 못하거나 조그만 박스 위의 숫자로만 남아 다 쓰러져가는 창고에서 잊혀 가고 있다면? 상상조차 두려운 현실이 지금 자유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주일이면 범인을 잡겠다고 생각했어요.”


성폭력을 신고하는 여성은 증거를 남기기 위해 자신의 몸에서 가해자의 DNA를 채취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몸에 닿는 차가운 도구들을 몇 시간씩 견뎌내고 나면 오히려 자신을 의심하는 수사관들의 모욕적인 질문들이 이어진다. 그 모든 과정을 꿋꿋이 마주하는 여성이 의지하는 것은 오로지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미국 전역에서 생존자들의 증거 키트들이 연 적도 검증된 적도 없는 상태로 40만 개가 넘게 발견된 것이다. 그 키트들 중의 일부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뒤였고 파기된 키트들 중에는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일까요.”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증거 키트들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원인은 재정과 인력의 부족이다. 하지만 부족한 자원을 배분할 때에 ‘뒤로 밀려난’ 사건이 어째서 성폭력 사건이 되었는가? 발견된 경찰 보고서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강간당한 피해자를 묘사할 때 주로 ‘진짜’ 피해자와 ‘진짜’ 강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피해자는 성적으로 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해 지칭하며 ‘믿을 수 없다’거나 ‘아직 알 수 없다’고 보았다. 현실은 면식범이나 가까운 사람에 의한 강간 피해가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피해자의 행동이나 트라우마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는 경찰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피해자상’에 들어맞지 않는 여성을 믿지 않았고 결국 사건은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쌓여가기만 하는 증거 키트들은 강간이 계속 일어나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뒤늦게 검증한 키트들에서는 여러 사건에 겹쳐지는 동일한 DNA들도 수천 개 발견되었다. 강간범은 많은 경우 연쇄 강간을 하기 때문이다. 검증하지 않은 증거는 가해자를 풀어두었고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경찰이 여성의 말을 믿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동안 여성들은 끊임없이 강간 피해에 노출되고 신고를 포기하고 가해자가 보복할 거라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숫자 말이에요. 나도 그중 하나예요. 그냥 숫자가 아니라 바로 여기 있는 나.”


누군가가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피해자의 모습은 현실에서도 지워진다. 엄연히 존재하는 그들은 한 인간으로서가 아닌 서류와 상자들 위의 숫자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검사 킴 워디는 숫자를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살려내는 키트 검증 작업을 시작한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던 생존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되찾는 모습을 확인해보자. <내가 증거다>는 9월 15일(토) 오후 5시 35분, 9월 16일 2시 15분에 여성인권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다.

'피움뷰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때 그 아이는  (0) 2018.09.15
10대 여성, 지금 여기서 변화를 만들다  (0) 2018.09.15
일상에서 용기를 내는 당신에게  (0) 2018.09.14
로시오와 알다나의 미래는  (0) 2018.09.14
말하는 여자가 바꾼다  (0) 2018.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