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포커스

[피움GV] 연대하는 여성들 말고 갈등하는 여성들

한국여성의전화 2019. 10. 5. 04:44

연대하는 여성들 말고 갈등하는 여성들

- 13회 여성인권영화제 GV 현장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 <경원(敬遠)> - 

 

오늘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104일 오후 3시 경쟁 부문에 진출한 5편의 단편영화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 <컷 아웃>, <대리시험>, <경원>, <풋스텝>의 상영 이후 감독과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램팀의 이세리의 진행과 함께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의 조한나 감독과 <경원(敬遠)>의 박소영 감독을 현장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여성 주인공과 여성 서사를 원하는 관객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여성 간의 연대를 그린 작품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도 못하는 영화가 수두룩한 현실을 고려해보면 여성 간 연대 서사의 필요성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여성들 간의 관계가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진 않다. 여성이라고 언제나 착한 것도 아니며,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서로 갈등을 빚기도 한다. 여성들에게도 각자의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이 타인의 욕망과 언제나 일치하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경원>은 이처럼 연대하는 여성들이 아닌 갈등하는 여성들을 그린 작품이다.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는 가부장제의 굴레 속에서 서로 상처 주며 미워하면서도 연민할 수밖에 없는 딸과 엄마의 관계를 그리고 있고, <경원>에서는 불합리한 제도로 인해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두 여성 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는 감독이 당신의 어머니를 인터뷰한 음성을 담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작품 속 화자는 네가 그러니까 괴롭힘을 당하지’, ‘정신병자 같다등의 언어폭력을 가한 어머니에게 그때 왜 그랬냐는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는 화자에게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하는 대신 옛날 일을 전부 기억해서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마치 심문회에 온 것 같다’, ‘나는 내가 그렇게 나쁜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할 뿐이다. 어머니의 과거를 알고 나서는 화자에게도 생각이 좀 더 많아지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원>천년 고도의 도시라 불리는 경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경주에서는 건물을 올리려면 의무적으로 지표조사를 해야 하는데, 만약 조사 중 유물이 발견되면 국가에 발굴구역으로 묶여 집을 짓지도, 땅을 팔지도 못하게 된다. 더군다나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채굴 비용은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매장문화재조사단장인 경원은 경주 자신의 땅에서 유물이 발굴되자 본인이 조사 중인 한 시각장애인 여성의 땅에 그 유물을 몰래 투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대방도 곧이곧대로 당하지는 않는다.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 <경원> GV현장 사진 

단편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다섯 작품의 상영이 끝나고 GV가 시작되었다. 먼저 두 감독은 작품에 담은 의도를 설명했다. 조한나 감독은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밝혔다. 조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자신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다고 느꼈다고 한다. 대화가 아니라 말대꾸하는 것이 되고,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혼나게 되는 식이다. 특히 어머니와 부딪히게 된 것은 가부장인 아버지가 방관하면서 여자들 싸움이 되어버린 측면이 크다고 전했다. 독특하게도 애니메이션 연출을 한 것은 인터뷰 음성에 맞추어 한 프레임씩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말들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스스로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박소영 감독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공간인 경주가 중심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소망에서 <경원>을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보통 미디어에서 경주는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화재의 도시로 그려진다. 하지만 박 감독은 경주의 거주 당사자로서 느꼈던 경주의 이면을 조명하고, 경주 주민이 겪어야만 하는 불공정한 제도를 더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주인공의 이름이자 작품의 제목인 경원은 한자가 敬遠으로 표기되어있는데, 주민들에게 강요되는 희생과 그로 인한 경주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경쟁과 갈등, 원망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이후에는 관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뱃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는 후반부에 어머니의 영상이 나오는데, 화면 전체가 자세히 알아볼 수 없도록 뿌옇게 처리되어있다. 왜 어머니의 얼굴을 가렸냐는 질문에 조 감독은 가족 간 갈등은 아무래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동시에 굳이 공개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조 감독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공감해주어서 신기하다고 했는데, 얼굴을 뿌옇게 처리함으로써 관객들이 영화를 더욱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경원>에 대해서는 주인공을 남초집단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는 질문이 던져졌다. 이에 박 감독은 유물 발굴 일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 남성이지만 여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닐뿐더러, 자신과 같은 성별인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일 때 스스로 몰입하기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 프로그램 팀원은 감독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하는 것이 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나올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에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평했다.

갈등하는 여성 관계는 왠지 여적여구도를 상기시키는 것 같아 꺼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여성들이 무엇 때문에 갈등하고 그 관계를 어떻게 이어나가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서로 다른 소재와 방식으로 갈등하는 여성 간의 갈등을 그려낸 두 감독님과의 대화를 통해 각각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가져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