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포커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요”

한국여성의전화 2015. 9. 18. 02:37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 <헌팅 그라운드>


글. 정혜윤 (연세대학교 제26대 총여학생회장)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 헌팅 그라운드(The Hunting Ground)는 미국 대학의 성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 헌팅 그라운드에 따르면 미국 여자 대학생 5명 중 1명은 성폭력을 당했다. 남성 성폭력 피해 또한 상대적으로 적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기 피해를 제대로 공론화하는 것조차 어렵다. 자신의 피해에 대한 정당한 해결 내지는 가해자에게 내려질 정당한 처벌을 위해 대학 당국에 자신의 성폭력 사건을 사건화하거나 공론화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대학 당국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무시당한다. 이유는 놀랄 정도로 명쾌하다. 그 대학에 ‘성폭력 사건이 있다’고 말하면 대학의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성폭력은 절대로 우연히, 충동적으로 발생되는 사건이 아니다. 성폭력은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치밀한 계획이나 계산 하에서 발생한다. ‘남학생 클럽’으로 대표되는 남성적 ·성폭력적 문화가 대학 공동체 안에서 교육·전승되는 것이다. 예일대학교 ‘남학생 클럽’ 학생들이 여자 기숙사를 둘러싸고 “아니라고 말하는 건 좋다는 뜻, 좋다는 건 항문섹스도 좋다는 것(No Means Yes, Yes Means Annal)" 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이런 문화를 가진 구성원의 재/생산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단 강간을 연상시키는 그 풍경은 한국에서 96년도에 500여명의 고려대학생들이 이화여대 축제인 이화대동제에서 난동을 부린 풍경과 겹쳐진다. 후에 이 사건은 성폭력으로 명명된다.


<헌팅 그라운드>는 미국 대학의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여성인권영화제가 열리는 한국 대학의 상황을 바라보면 어떨까. ‘남학생 클럽’도 없고, 대학의 기업화가 미국만큼 심각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캠퍼스에서, 과방에서, 강의실에서, 농활에서, 교수의 연구실에서, 대동제 등의 학생 행사나 동아리 행사의 뒷풀이 술자리 등에서 성폭력 사건은 만연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폭력이 ‘예전과 달리’ 지금의 대학 캠퍼스(어쩌면 한국 사회에서까지) 말끔히 소거된 것처럼, 일부의 ‘싸이코’만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벌이는 것처럼 여기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일단 학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얼마나 발생하는지 알려고 해도 통계를 공개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알 수가 없다. 미국 대학과 같은 이유로, 한국 대학도 경영 주체로서 대학 브랜드 이미지를 잘 관리하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2015. 09. 17. 제9회 여성인권영화제 <헌팅 그라운드> 피움톡톡




헌팅그라운드에서 주인공들은 힘을 합쳐 운동가 그룹을 만들고 법을 잘 활용해 피해자들의 삶과 대학 사회에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변화는 미국 사회의 변화까지 이끌고 있다. 이들의 운동이 확산되어, 오바마는 2014년 1월 대학 성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국을 돌아보자. 한국의 여성주의 운동의 지평은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가 사회현상으로 대두되며 다시 여성혐오나 여성주의 운동에 주목을 하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통상적으로는 대여섯 명 정도 올까말까 하던 각 대학 여성주의 단위 오픈 세미나에 20,30명이 찾아오는 기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류가 얼마나 지속되고 확산될지 판단하기는 섣부른 측면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과 반성폭력 운동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섣부를지도 모른다.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은 여성과 약자의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한다. 게다가 몰카 문제가 심각해 여성들은 공공화장실이나 대중교통 이용뿐만 아니라, 숨 쉬며 걷는 것조차 두렵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런 자유를 위해 허용되어야할 것은 일부에게 주어지는 무제한의 자유-타인에게 폭력을 행할 자유-가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자유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더 나은 대학 사회와 공동체를 희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있어, 희망은 분명 있다.


영화제 이튿날인 9월 17일,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 권김현영과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 송란희가 함께 한 피움톡톡에서는 출연자뿐 아니라 관객들 모두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연대와 학생, 학부모, 교직원들의 지지가 성폭력 문제 해결에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때로 지치거나 위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나아가며,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계속 이야기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