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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테이션/가장자리/더도말고 덜도말고] '일상'을 관통하는 '폭력', '저마다'의 다른 '일상'

한국여성의전화 2013. 11. 10. 18:35

이번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섹션 중 하나인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는 이번 영화제의 주제인 '직면의 힘'이 우리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섹션이다. 특히 일요일 오후에 상영되었던 세 편의 단편 영화 '오리엔테이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장자리'는 일상 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발견되는 폭력들의 모습과 그런 폭력들에 대처하는 저마다의 모습을 보여주며 가장 우리나라의 그리고 내가 처해있는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오리엔테이션> 스틸컷

 

첫번째 영화였던 '오리엔테이션' 은 폭력이 일종의 단합을 위해 이용된 경우로 대학 새내기 오리엔테이션 때나 선후배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구조 사이에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잘못한 것 없이 정말 이유없이 기합을 받고 얻어 맞아가면서 어떻게든 의사가 되고자 하는 새내기 의사들은 처음에는 그 불공정함에 화를 내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심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피해자부터가 그 불공정한 상황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각기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끝까지 대자보를 붙이려 했던 이들 중 하나였던 정은을 오히려 다른 이들의 안위에 해를 끼칠 위험인물로 낙인찍기까지 한다. 불의를 불의라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고발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가 방관자가 되게 하고 오히려 사건을 묻어두고 일종의 전통으로 묻어 가려는 모습들. 이런 모습들은 특히 대학과 군대에 가면 쉽게 발견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거행되는 이 폭력의 현장을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 폭력이 과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때로 시간을 되물림되는 이 폭력에 대해 경험한 이들은 자신이 경험했기에 다음 세대도 경험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해야만 단합이 되고 그렇게 해야만 선배로서의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면 자신이 겪었던 그 피해갈 수 없었던 약자의 상황 속에서 억울하고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 같인 폭력이 형태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두려움과 반발을 마음 속에 심어 놓는다. 그 어디에도 존경과 이해는 없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더도말고 덜도말고> 스틸컷

 

두 번째 영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는 이제 막 19살, 성인이 되기 직전의 아이들의 불안한 심리가 아주 사소한 계기로 폭력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수능을 40일 정도 남긴 어느 날 주인공은 자신이 항상 귀에 꽂고 다니던 아이팟을 독서실에서 분실한다. 분실한 아이팟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알아보던 그녀는 그녀와 같은 독서실에 다니는 그리 친하지 않은 친구 하나를 의심하게 되고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주도로 추석날 닫혀 있는 독서실 문을 열고 자신이 의심한 친구의 사물함을 열어보게 된다. 사물함에는 주인공의 아이팟은 없었지만 훔친 것으로 추정되는 다이어리가 있었고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완전히 그 사물함의 주인을 도둑으로 추정하게 된다.


결국 꺼림직하고 속으로는 뭔가 해결된 것 하나 없이 한 소녀를 도둑으로 몰아가며 폭력을 행사하며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팟을 되찾게 되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소녀는 도둑이 아니었다. 하지만 폭력이 자행된 밤 다음날 굉장히 모순적이게도 사과를 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닌 도둑으로 억울하게 몰려 폭력의 대상이 된 학생이었다.

 

그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각은 하나 제대로 자각할 수 없는 불안한 시기에 머뭇거림은 있었으나 어찌되었든 폭력은 행해졌고 그렇게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가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일이 잊혀진다해도 과연 정말 그 일이 없던 일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그녀들 각자에게 달려있는 문제일 것이다. 과거는 어느 정도 잊혀질 수는 있지만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그 날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그냥 시간에 맡겨 버린다는 것이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완벽하게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가장자리> 스틸컷


세 번째 영화 '가장자리' 는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의 모습과 피해자가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되는 모습, 그리고 방관자 역시도 폭력의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2번째인가 3번째로 보는 영화다 보니 처음봤을 때보다 충격이 덜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같은 부분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인 '가장자리'가 굉장히 잘 지어진 제목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도움을 청할 수 없는 피해자 영욱의 상황은 그가 우연찮은 상황에서 가해자인 하성을 살해하며 더욱 더 그의 검붉은 학과 같이 가장자리로 몰리게 된다. 아슬아슬 떨어질듯말듯한 상황에 놓인 영욱은 결국 우진의 제대로 된 대답없이 자살로 끝을 맺게 된다.


가장자리. 그 말은 영욱의 현실일 수도 있으며 분명 함께 있으나 가장자리로 그 자신들의 위치를 설정하며 문제에 제대로 개입하지 않으려 하는 우진을 포함한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욱의 죽음으로 과연 가해자와 피해자는 완벽하게 사라졌을까? 또 다시 사람만 사라졌을 뿐 학교 폭력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계속해서 방관만을 했던 우진은 영욱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방관자가 아닌 개입자가 된다.


 

최근 나오는 보고서나 방송 등을 보면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방관자들의 역할을 굉장히 강조하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관자가 사건에 개입하게 되는 경우는 정말 힘든 일이며 잘못 했다가는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사회는 학교 폭력으로 안타깝게 지는 청춘들을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지키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의식과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는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으로 폭력이 만연해 있다. 우리는 이것을 폭력이라고 자각은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미 너무 무기력한 모습으로 그리고 무감각하게 그저 그 폭력의 현장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그 자신 스스로가 가해자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뭔가 단순히 폭력의 종류를 나누고 카테고리화시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이미 그물망처럼 퍼져있는 구조적 폭력 관계 속에서는 그리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정말 폭력을 문제라고 인식하고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직면한 뒤 좀 더 피해자들을 지지하며 제2, 제3의 피해를 주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같은 사실을 두고서도 다르게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다양성이고 우리는 그런 다양성을 전제로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개인이기도 하다. 한 사람으로서의 존재로서 존중하며 문제를 문제라 말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성숙한 사회를 그려본다.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_유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