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톡톡

우리에겐 폭력에 대한 언어가 필요하다

한국여성의전화 2016. 10. 28. 13:39

우리에겐 폭력에 대한 언어가 필요하다


〈햇살 쏟아지던 날〉 〈달팽이〉 〈십 분간 휴식〉


원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10월 15일 일요일, 서둘러 영화를 취재하러 가는 길 영화제 폐막식을 앞둔 아쉬운 때문인지 비가 발길을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극장에 도착했다.

 

이날 상영된 세 편의 영화: 유영대 감독의 〈햇살 쏟아지던 날〉과 진성민 감독의 〈달팽이〉, 이성태 감독의 〈십 분간 휴식〉은 지난 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으로 이번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들의 의도를 담아 '한남은 어떻게 태어나는가'라는 주제로 기획된 앙코르 상영전이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유년기와 학창시절, 군 생활− 세 단계로 나뉘는 한국 남성들의 성장과정, 한남의 발생지를 유추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도대체 분노 외에 뭐가 남는 영화일까 생각했다.


분노하는 것 외의 다른 언어가 없었다. 이민경 저자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라는 책도 출간된 바 있는데− 어떤 식으로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나쁘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받아들여질 여지로서의 폭력과 이해의 언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15일 보신각에서 진행된 낙태금지법을 반대하는 검은 시위 “내 자궁의 주인은 나, 나의 자궁 나의 것” 역시 여성들의 '언어를 획득하려는 노력'이고 그런 노력을 우리는 연대의 힘으로 지속해 나가고 있지만(많은 사람들이 여성−인권이 죽었다는 의미에서 검정색을 드레스 코드로 맞추고 저마다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그 중 인상 깊었던 문구는 ‘정자도 생명 암세포도 생명’ ‘엄마나 예비신부이기 전에 여자도 사람’ ‘덮어놓고 낳다보면 내 인생은 개망한다’ 등이었다. '내 자궁은 공공재가 아니다'라는 문구도 눈에 띄었는데, 이 폭력의 기저에는 마치 출산율 저하와 사회 노령화 문제를 여성의 자궁으로 해소하려는 뉘앙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회는 여성들의 언어를 빼앗아 왔다.


젠더 규범의 쇠몽둥이

〈햇살 쏟아지던 날〉은 그들의 놀이에서 배제되는 한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들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그들이 구사하는 폭력의 언어(작고 부드러운 병아리―‘여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을 “사내자식이 이딴 거 좋아해도 돼?”라는 젠더 규범의 쇠몽둥이로, 병아리를 바닥에 내던져 죽여버리는)를 그대로 모방하고 한발 더 나가 밟아 죽인다. 이 여자 아이는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 걸까.


나는 여자 아이의 ‘밟아 죽이는’ 행위가 남자 아이들이 병아리를 내던지는 것(폭력이 구조화되는)과 같은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 아이들은 자기가 남성이라는, 여성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부정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병아리를 내던지지만 여자 아이는 자기가 남자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는(그렇지만 다른) 여성스럽지만은 않다는(마찬가지로 구조화된 폭력, 그 자체로 폭력이 되는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젠더 규범으로서의 여성) 젠더 규범의 혼란 속에서 홀로 싸운다. 이런 혼란이 발생하는 건 애초에 “여성이면 여성답게 행동하라” 것 외에 제대로 된 여성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 편의 영화의 공통점은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

‘한남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주제로 진행된 피움톡톡에서 〈햇살이 쏟아지던 날〉에서는 소녀가 병아리를 밟아 죽이는 것으로, 〈달팽이〉에서는 교탁 위에 올라간 현우가 하의를 탈의하는 방식으로, 〈십분 간 휴식〉 이 영화를 해석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는데− 딱 뭐라고 짚어낼 수 있을 만한 ‘행동 없는 행위(복종에의 강요)’들에 대해 사회자는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 가장 강렬한 복수”로 해석했는데― 그들이 자라온 환경 그리고 어떤 규범 아래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달팽이〉에서 “현우가 종필이를 때려눕히는 결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다”는 말에 동감하는데, 이 영화의 분량이 좀 더 늘어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물러서지 않고 비굴해지지 않는 것이 현우가 가지고 있는 언어일지 모른다.


피움톡톡에 함께한 패널들은 한남 탈출기, 남성성으로서 찌질함을 발견했던 순간을 고백하면서 자신 역시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한남 퍼센티지를 매길 수 있다면?) 53%, 47% 정도로 밟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위트를 섞어 말했다. 우리는 모두 그런 퍼센티지만큼은 한남이고 꼭 그만큼 페미니스트이고,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분노를 상기하고, 그 분노를 금방 타버리는 성냥에 붙은 불씨로 얻어 나의 언어를 획득하려는 노력에 불을 당기기로 한다. 성냥불은 금방 다른 곳에 옮겨 붙이지 않으면 꺼뜨리고 만다. 꺼지기 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옮겨 붙여서, 한 사람 한 사람 연대의 불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