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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은 회복되어야 한다

한국여성의전화 2017. 9. 24. 01:55

기울어진 운동장은 회복되어야 한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시체가 된 여자들> 피움톡톡


예원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지하철역 출구에서 들려온 여성들의 외침과 <82년생 김지영>에서 드러난 외침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성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살고자 하는 외침이다. 9월 23일 저녁. 이 외침에 대한 두 영화가 상영됐다. <시체가 된 여자들>과 <여성 해방으로 좌회전>이 그것이다. 두 영화의 연이은 상영 이후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의 8번째 피움톡톡이 진행됐다. 송란희 여성인권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의 진행 하에 배우 김꽃비, 영화평론가 정민아, 영화감독 홍재희가 함께 했다.


시체가 되는 여성들

“시체가 진짜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너무 놀랐어요.” 한 관객은 <시체가 된 여자들>을 보고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우리는 여성이 죽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다. 물에 떠 있기도 하고, 절벽에서 굴려지기도 한다. 피를 흘리기도, 깨끗하기도 하며 눈을 감거나 뜨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다루어지는 만큼,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암사자들>, <아버지의 이메일> 등을 연출한 홍재희 감독은 <시체가 된 여자들>을 통해 시체 단역 배우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에 사용된 기존 드라마와 영화 클립들을 사전에 접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시체 장면들만을 모아 보니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 시체 자체가 포르노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젊고 예쁜 여성들이 시체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영화 서사에 필수적이지 않은데도 카메라가 여성의 몸을 훑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해 배우 김꽃비는 죽은 여성의 포르노적 소비가 비공식적으로 장르화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상상력의 빈곤이 낳은 장르

그렇다면 비공식적 장르는 무엇 때문에 탄생했을까. 홍재희 감독은 ‘상상력의 빈곤’을 그 이유로 짚었다. 2000년대 초반의 영화와 오늘날의 영화에 나타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주류 영화를 타고 흐르는 기저에는 한국 특유의 군대 문화가 있는데, 여기에서 여성의 대상화가 시작된다. 군대 문화에서 남성성을 찾고, 집단 성매매로 남성성을 확인하듯 영화에서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남성성을 확인하는 방식이 재현된다.

정민아 영화평론가는 독립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주류 영화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유로 안정된 수익을 추구하는 영화계 관행을 지적했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 이외에도 공정한 목소리들이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 주류로 편입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관객은 동의한다며 자본주의와 가부장주의가 찰떡처럼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흔히 ‘여자가 나온 영화가 재밌으면 더 많이 만들텐데 그렇지 않으니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라는 비판은 ‘여성이 일을 잘하면 더 많이 채용할 텐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관객이 주도적으로 선택하기에는 영화계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와 싸워야 한다.

 그렇다면 이를 해소할 방향은 어디일까. 홍 감독은 “개인과 싸울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철저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홍 감독은 독립영화계에서 전세계가 공통으로 여성이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영화와 장르영화에서는 그 변화가 멸종되는 이유를 자본 권력에서 찾았다. 과거와 달리 영화계에 여성 인력이 대거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만드는 투자자는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녀 임금격차나 남녀 빈곤율을 뒤집어보면 곧 여성들이 자본 권력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이는 곧 보편적 감수성이 남성 위주로 치우쳐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뜻한다. 한 사람이 바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정민아 영화평론가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에 내부의 목소리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실제로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성감독과 여배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배우 김꽃비가 시작한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 페미’가 좋은 예다. 배우 김꽃비는 이를 시작으로 영화업계에 변화가 생기길 기대한다고 답했다. 

"이게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구나." <시체가 된 여자들>의 한 배우가 죽음을 연기하며 깨달은 것이라고 한다. 죽음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반드시 어떤 여성에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달은 것은 우리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송란희 여성인권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영화업계의 변화는 우리 사회 전체 성평등 개선과 관련되는 문제라고 밝혔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스스로와도 직결된 문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끊임없이 감시할 수 있는 관객으로서의 몫을 다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