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뷰어

[마취],[열정의 기준],[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방관자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피움 2012. 9. 23. 00:51

 

 

[마취]

 

내과 진료실 침대에 마취된 환자가 누워있다. 방 안에는 의사와 환자 둘 뿐. 그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폭력을 목격하고야 만 지현은 다른 간호사들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다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주저한다. 자기도 모르는 새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피해자를 찾아가보지만 피해자는 진실을 알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삶에 균열을 가져온 지현에게 되려 원망을 쏟아낸다. 가해자인 병원장은 자신의 범행이 목격된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 가해자의 양심적 가책조차 부재한 상황에서 피해자와 목격자들의 갈등만 더해간다. 더 이상의 폭력을 묵인할 수 없는 지현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기를 선택하며 침대 위에 올라간다.

 

 

[열정의 기준]

 

사회복지사 미영은 가정폭력 피해자인 은지를 쉼터에서 지내도록 도와주고 돌봐 준다. 그러나 은지는 남편의 애원과 홀로 된 불안감에 고민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미영은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며 더 이상의 도움을 거부하는 은지를 구출해내기 위해 은지의 남편과 대면하고, 급기야 그로부터 폭행을 당한다. 양수가 터진 채 은지는 미영을 노려보며 나가라고 말한다.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밤늦은 시간, 인적 드문 골목에서 두 여자가 만난다. 중년의 여자는 맨발로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젊은 여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낯 모르는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 벌벌 떨며 말을 더듬는 중년의 여자에게 단지 주머니 속의 몇 천원을 건네줄 뿐이다. 그녀는 “아줌마, 집에 가면 안 돼요.” 한 마디를 건넨 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방관자들]

 

관객은 CCTV의 시점으로 주인공 소녀를 바라본다. 주인공 여학생은 주변 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한다. 상습적인 언어폭력, 신체폭력, 성폭력에 노출돼 있지만 목격자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엘리베이터에, 지하 주차장에, 쓰레기장에, 모텔 복도 곳곳에 도처 해 있는 CCTV 뿐이다. CCTV는 무엇을 찍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소녀는 폭력이 목격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이 발견한 카메라 앞에서 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관객에게 경종을 울린다. 당신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왜 보고만 있는가.

 

 

위의 네 단편작들은 ‘목격자와 증인들’이라는 테마로 한 자리에 모였다. 흥미로운 점은 각 작품들에서 가해자는 주체도 아닐뿐더러 아예 사건에서 제외된다. 피해자와 목격자의 관계, 갈등, 선택으로 이야기가 구성되고 전개되어간다.

 

 

우선 피해자들은 단순한 약자가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나름의 선택을 한다. 때로는 진실을 덮어놓기를 ‘선택’하기도 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려고 하기도 한다.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목격되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는 꽤나 새로운 서술방식이다. 영화들은 피해자를 약자로 종속시켜버리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그들 나름의 판단을 하고, 도움을 청하고, 선택을 하는 과정을 통해 객체가 아닌 주체로 거듭난다. 때로는 자신을 약자로 규정지어버리려는 목격자에게 반발을 하기도 하면서(‘열정의 기준’).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목격자들의 시선이다. 목격자들의 대처방식은 다양하다. ‘마취’의 목격자 지현은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하며 급기야는 피해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열정의 기준’의 미영은 피해자의 영역에 침범해 들어가 직접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의 젊은 여자는 최소한의 도움만을 주고, ‘방관자들’에서의 CCTV, 즉 관객(더 나아가 우리 모두)은 제목 그대로 사건을 방관할 뿐이다. 누구는 나서서 증인이 되고 누구는 증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영화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자로 남을 것인가. 증인이 될 것인가 방관자가 될 것인가. 증인이 되는 일은 개인의 삶에 큰 균열을 가져올 수 있으며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우리가 증인이 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면 멋대로 증인이 되어줄 수도 없다. 이는 혼자 판단하고 결정해버릴 간단한 문제가 아닐 테다.

 

머리가 복잡하시겠지만, 나는 이렇게 (간편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증인이 되든 방관자가 되든 선택하라. 시간의 흐름이 멋대로 결정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다. 설사 당신이 방관자가 되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숙고 끝에 택한 선택이라면 누구도 당신의 선택을 쉽게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웹기자단_ 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