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평화는 가짜다


이소연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평화는 누구의 언어인가? 


나는 불과 이틀 전까지 동네에 있는 PC방에서 알바노동을 했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일했던 친구는 야간에 PC방에서 일하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꿀을 빤다는 것이다. 실제로 야간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10시 이후에는 라면도 끓이지 않을뿐더러 자정 넘어서부터는 손님도 적어 한산했다. 고난은 예상하지 못한 일에서 시작됐다. 


손님들이 툭툭 던지는 말과 눈빛에 나의 일터는 성폭력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귓속말로 “향수 뭐 써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 왜 묶었어요? 나는 푸르는 게 좋던데.”라고 외모 지적을 하는 사람까지, 심지어 엊그제에는 취객이 PC방에 들어와 내 손을 더듬으며 “남자 꼬시려고 하지 않아도 남자를 꼬실 수밖에 없는 몸 냄새가 난다”고 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겠다 싶어 그날로 일을 관뒀다. 신고는 못 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그 아저씨가 나에게 보복을 할까 두려워서다.


사장님을 비롯한 남자 알바노동자들은 나의 이야기에 많이 놀란 듯 보였다. 자신들이 보기에 점잖았던 손님들이 여성인 내게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이중성을 그들은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계속되는 성희롱 탓에 나는 일을 관둬야 했건만, 사장님은 “그래도 이만하면 일은 쉽지 않았니?”라고 말했다. 나는 PC방에서의 노동이 전혀 쉽지 않았다. 평화롭지도 않았다. ‘좋은 일터’라는 말은 나의 언어, 즉 여성의 언어가 아니다. ‘평화로운 일터’는 여성의 경험을 기만한다. 세상의 절반인 남성들의 경험을 토대로 구성된 이 말은, 여성이 일터에서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사소하고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일축해버린다. 



반쪽짜리 인권


그 평화는 가짜다. 이 사회가 말하는 평화가 가짜이기 때문에 그 인권은 가짜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 인권은 가짜다>는 세상 절반의 평화를 토대로 쓰인 반쪽짜리 인권의 실체를 고발한다. 영화는 헌법에 규정된 ‘평등할 권리’가 세상의 절반인 남성의 언어로 쓰였다고 말한다. 남성들‘만’ 헌법을 썼다. 여성들은 헌법이 만들어질 당시, 제도적으로 배제되었다. 인간의 평등을 논해야 하는 헌법 자체가 이미 기울어진 성차 위에 세워진 것이다. 지금의 헌법은 ‘남성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세상을 살아갈 권리’인 셈이다. 




반쪽짜리 헌법은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인간 이하의 삶으로 몰아넣는다. 영화 <그 인권은 가짜다>는 구조적으로 평등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은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미국에서는 자동차 사고보다 가정폭력으로 죽는 여성의 수가 더 많다. 미국 대학 내 폭력 범죄 1위는 강간이다. 42만 명의 여성들이 그들의 자녀와 함께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미국의 여성 노동자 셋 중 한 명은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을 겪고 있다. 미국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가정폭력, 성폭력, 그리고 임금차별은 미국 헌법 안에서 여전히 여성과 남성의 권리가 동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영화가 말해주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어떨까? 한국의 인권도 가짜다. 가정보호사건은 2011년 이후로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9489건으로 급증했다. 상해 및 폭행이 전체의 84.4%에 달한다. 성폭력 범죄 역시 10년째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3년에만 2만 6919건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성폭력 범죄의 대부분이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범죄임을 감안하면, 실제 성폭력 범죄는 6배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규직 근로자의 여남 임금격차는 36.6%로 OECD 평균인 15.6%의 두 배를 웃돈다. OECD 최하위다. 한국에서도 여성은 법이 말하는 ‘인간 혹은 시민’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여성의 언어로 고발하기


<그 인권은 가짜다>는 절반의 인권을 우리 모두의 인권으로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의 언어로, 지금의 세상이 남성의 평등과 평화를 위해 짜여 있음을 끊임없이 고발해야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 인권은 가짜다>는 그 자체로 불평등에 대한 고발이자 여성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인권 선언이다. 영화에 출연한 여성 출연진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평등할 권리는 법 안에서 성별 때문에 부정이나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이다. 평등은 평등이어야 한다는 것. 


반쪽에 불과한 평등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투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끝까지 투쟁하자”고 말한다. 나 역시 일상의 투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볼 작정이다. 무엇보다 나는 진술의 힘을 믿는다. 여성의 말로, 여성의 몸짓으로 기록한 반쪽짜리 인권 실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평등이 가짜일 뿐임을 증명한다. 우리의 법과 제도가 겨우 절반의 인권만을 보장하고 있음을 인식할 때, 인권은 새롭게 쓰일 수 있다. 나는 그때까지 끊임없이 외칠 테다. 그 인권은 가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제10회여성인권영화제 '단순한 진심' 2016년 10월 10일(월)~10월 16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