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이지 않은 성>
-남성 혹은 여성, 답안 없는 선택지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두 개이지 않은 성>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이지 않은 성>은 1500-2000명에 한 명꼴로 태어나는 ‘간성Intersex’에 대한 이야기이다. 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여성’으로, 페니스가 있기 때문에 ‘남성’으로 부르도록 하자는 언어체계 내의 약속이 법칙으로 굳어져 버린 현재 사회에서, 양쪽 모두를 지니고 태어난 그들은 남성/여성이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간성’이라는 태생적 정체성을 버리고 남성 혹은 여성으로 자신을 ‘교정’해야만 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는다면, “정의내릴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일 뿐이라는 사회의 폭력적 협박 속에 고통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회구조는 끊임없이 그들을 기존 체제 내로 길들이려 한다. 이들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해야만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 내에서 하나의 이름, 여성 혹은 남성으로 불리기 위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심지어 부모와 의사의 결정만으로 두 성기 중 하나를 잘라 내거나 붙이고, 변형해야 했다. 부작용의 위험을 안고 호르몬제를 투여했으며 정신적으로도 큰 혼란을 겪어왔다고 한다. 이런 시도들 끝에 그들은 마침내 여성 혹은 남성으로의 이름을 얻게 된다. 하지만 결국 간성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조차 그것이 그들의 진짜 성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실, 이 견고해 보이는 사회는 너무도 자의적인 체계 위에 놓여있다. 내가 여성일 수 있는 이유는 질과 같은 이름이 붙여진 생식기를 가지고 있으며 나와 같은 이들을 여성이라 부르도록 사회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만약 약속 당시, 나 같은 생식기의 소유자를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 명명하기로 했다면 여성은 현재 남성으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기본 속성인 자의성이며 이 자의적인 언어가 우리의 사회를 지배하는 체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를 통해 살아가는 이상 ‘이름표’를 떼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간성이라 부르는 이 사람들을 간성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약속한다면, 그들은 남성/여성이 아니라 진짜 성별로서 ‘간성’이 될 수 있다.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두 개이지 않은 성> 스틸컷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화 안에서 출연자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제시되었던 “다름에 대한 관용”일 것이다. 인터뷰를 통해 그들은 “수술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았다.”, “자기 자신에게 편안해 지는 것이 어려웠다.”, “나 자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의사의 결정을 통해 잘라 내거나 성형할 성기를 정하고, 그 후엔 자신의 몸에 남은 성기에 따라 성역할을 강요당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강요는 ‘회색지대 없는’ 흑백논리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하라는 사적 해결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관용이고 나아가 그 논리체계를 전복하려는, 혹은 부드럽게 하려는 노력이다. 주류 세계에서 외따로 떨어진 예외에 대해 올바른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아닐까. 이렇게 될 때 이들은, 그리고 나아가 우리 모두는 ‘진짜’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그 시작점으로 '그 날'을 고대해 본다.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_이슬비
'피움뷰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걸 파워 / 순결학개론] 여성의 의무에 대한 고찰 (0) | 2013.11.09 |
---|---|
[옆집 아이] 우리 옆집에도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0) | 2013.11.09 |
[마이플레이스] SOUL, 어긋난 퍼즐의 마지막 한조각 (0) | 2013.11.09 |
[회색 지대 : 철창 안의 페미니즘] 우리 사회에 회색이 필요한 이유 (0) | 2013.11.09 |
[걸 파워 / 순결학개론]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여성들의 전쟁 (0) | 2013.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