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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아이] 침묵의 독이라는 이름

한국여성의전화 2013. 11. 9. 05:12

 

 

침묵의 독이라는 이름                             

 

나랑 엄마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빠가 엄마한테 막 소리를 지르더니 엄말 때렸어. 뭐 때문인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 언젠가 한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아직까지도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놀랐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 일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었다.

 

친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던 무지했던 내가 조금 더 일찍 영화 옆집 아이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가부장적인 사회 통념을 바탕으로 집안에서 최고의 권위와 힘을 자랑하는, 아버지라는 그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잘못된 행동에 맞서 싸워야 하며,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그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더 큰 힘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말했더라면 나의 친구는 일찌감치 치유 받아 그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었을까.

 

여기에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겪은 페니와 브래드가 있다. 그들은 결혼을 하며 반드시 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거라 다짐한다. 그러나 10년이라는 결혼 생활 동안 그들은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고 만다. 결국 남편 브래드가 아내인 페니에게 끔찍한 상해를 입히고, 그녀의 친구를 살해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리고 페니와 브래드 사이에는 네 명의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페니와 브래드처럼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환경에서 자라나 아빠가 엄마에게 총을 쏘고, 엄마의 친구를 살해하는 끔찍한 상황을 기억 속에 간직하게 된다.

 

이 강렬한 장면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내 생각에 이 장면은 아마 그들의 머릿속에 영구적으로 저장되고 재생되며, 절대 지워질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기억에 인생 전체가 흔들리거나 얽매이도록 놔둘 수는 없다.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이 끔찍한 장면을 조금 덜 재생시키고, 그럴 때마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직면이다.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옆집 아이> 스틸컷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당사자인 페니와 네 자녀들의 각기 다른 직면의 과정을 잘 담아냈다는 것이다. 먼저, 페니는 그야말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의 세월을 보낸 피해자였다. 10년 동안 계속적으로 폭력을 경험한 후 끔찍한 상해를 입었고,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으며, 남편이 감옥에 간 뒤엔 경제적으로 파산한 상태로 네 아이를 키워내야 했던 것이다. 그녀의 사건은 신문에 게재될 정도로 유명했지만, 적절한 보호와 치유를 받지 못했고,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무너져 내린 자신을 추스르기 전에 돈을 벌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감싸 안아야만 했다.

 

그런 그녀는 오랜 시간을 돌아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기로 결정하면서 직면이라는 문을 연다. 상처를 다시 한 번 끄집어내는 것이 끔찍하리만큼 싫었을 게 분명하다. 배우가 아니고서야 누가 자신이 주인공인 공포영화를 반복적으로 보고 싶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겪은 상황을 타인과 나누며 그 때의 자신의 감정과 현재의 감정, 아이들과의 관계와 마주함으로서 절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알리며 사회에 커다란 메시지를 보낸 것은 언제까지나 피해자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용기 있는 여성으로서의 멋진 한 걸음이었음이 분명하다.

 

반면, 맏딸인 열여섯 살 첼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첼시는 오히려 피해자인 엄마를 미워하고,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도 아빠가 자신의 롤모델이며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생각지도 못한 첼시의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첼시의 순수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아빠가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입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첼시는 아빠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 의해 엄마를 멀리하고, 그 날의 사건으로 인해 믿었던 사람(아빠)에게 배신당했다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것이다.

 

제 7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옆집 아이> 스틸컷

 

본인의 자아나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은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기 쉬운 존재이다. 그러나 한 번 잘못된 인식이 자리 잡아 뿌리를 내리면 그것을 바꾸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아직 사춘기를 지나지 않은 어린 동생들의 경우, 올바른 인식을 확립시켜주는 것이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첼시의 경우는 위의 점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텔레비전 쇼 출연을 통해 첼시와 아이들은 문제의 정확한 점을 짚어보고 그에 직면하는 기회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 직면의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특히, 사건 이후 세상과 모두에 분노했던 첼시는 마음을 열고 아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면을 모두 바라본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받아들이고, 피하려고만 했던 문제에 맞서기로 마음먹는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심각하게 엉켜버린 실타래와 같았던 페니 가족의 관계는 직면의 힘에 의해 조금씩 풀려나가며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이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정폭력에 대해 함구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깨기 위해 행동하는 중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영화를 보면서야 비로소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많은 아동이 가정폭력을 겪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묵인하고 있으며, 문제에 대한 직면이라는 문 앞을 서성이며 차마 열지 못하는 안타까운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절반이 넘는 가구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난다고 한다. 심지어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을 하더라도 집안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라며 개입을 꺼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정폭력은 더 이상 한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부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가정의 형태가, 사람들의 인식이, 사회가 변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더 이상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에 휩싸인 아이들을 '옆집 아이'라 방치해두지 않기를.

 

 


 

제7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_이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