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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더 높이]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

한국여성의전화 2014. 10. 13. 19:04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

 다큐멘터리 <가볍게, 더 높이> -

 

 

링 안에서 그녀는 주먹을 쥔다. 쉼 없이 발을 구르고, 눈은 날카롭게 목표물을 응시한다.
가볍게 뛰어 오르는 순간, 그녀는 높게 팔을 뻗는다. 그녀를 가로막는 링 밖의 세상을 향해!

 

밑바닥의 삶 속에서

 

그녀의 집에 사는 새는 바닥을 서성이기만 한다. 새장 안에 가둬두지도 않고, 줄을 묶어 매달아 놓은 것도 아닌데, 양 날개가 꺾인 것처럼 그저 바닥을 전전할 뿐이다. 마치 발에 붙은 바닥이 자신이 사는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가장 밑바닥에서 전전해야 하는, 달릿들처럼.


인도의 한 소녀, 뚤라시(Thulasi). 그녀의 이름은 ‘뚤라시’지만 그녀를 가장 처음 설명해주는 것은 이름이 아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신분’이다. 인도에서 태어난 뚤라시는 가장 낮은 ‘달릿(불가촉천민)’의 신분을 쥐고 세상에 나왔다. 
여전히 사람들을 계급으로 나누어 규정짓는 인도에 태어난 달릿, 불가촉천민들은 살아가는데 있어 자신의 의지로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
그 중에서도 뚤라시와 같은 달릿 여성들은 꿈은커녕 변변한 직업 하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은 물론이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남편의 말에 숨죽이며 또 다시 달릿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것이 삶의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라미드형으로 이루어진 신분계급 구조에서 가장 낮은 계급, 단지 ‘달릿’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없다.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러나 뚤라시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기를 원한다. 10년간 권투를 해온 라이트플라이급의 권투선수인 그녀. 자신이 권투를 떠나도 권투는 자기를 떠나지 않을 거라 말할 정도로 ‘권투’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권투선수로서, 그녀는 25세가 되기 전에 대회에서 우승하여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만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직업을 가지게 해준다는 것이 아닌,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뿐이지만 그녀는 필사의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미 뚤라시의 나이는 스물 넷. 어느덧 기회는 ‘마지막’이 되어 그녀를 찾아왔고, 그녀는 십년이라는 시간동안 노력하며 갈망했던 그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주저앉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는다. 기회를 놓치고, 벽에 가로막혀도 뚤라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신분이 가져다 준 자신의 운명. 최하층민, 달릿의 딸, 누군가의 아내로서만 살아야 하는 그 운명을 이기기 위해 그녀는 다시 주먹을 쥐고, 힘껏 팔을 휘두른다. 검은 창에 잡아먹혀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을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이 아닌 ‘나’로써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앞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뚤라시는 계속 해서 주먹을 뻗는다. 현실의 벽이 자신을 가둘 수 없게. 
그녀는 높이 뛰어오른다. 벽 너머로 보이는 완전한 자유의 세계로 뛰어들기 위해서.
오직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그녀의 용기 있는 질주는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서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