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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더 높이] 자유를 향해, 가볍게 더 높이

한국여성의전화 2014. 10. 16. 15:16

 

자유를 향해, 가볍게 더 높이

 다큐멘터리 <가볍게, 더 높이> -

 

 

'보편적인' 권투선수 이야기?

 

영화를 보기 얼마 전, 공교롭게도 김언수의 단편소설 ‘잽’을 읽었다.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설 또한 주인공이 권투를 한다. 부조리한 세상에 불만을 느끼던 주인공이 선생님과의 충돌을 계기로 권투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 소설의 주요 줄거리다. 비슷한 주제의 다른 소설들과 달리, ‘잽’은 후반부에 나름의 반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특정한 계기로 운동에 빠져들고, 그 과정에서 성장과 동시에 봉착한 문제를 해결해내는 줄거리의 뼈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에는 그 책을 보편적인 스포츠 소설이자 성장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본 뒤,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 소설은 보편적인 이야기일까? 누가 들어가도 같은 그런 이야기일까? 만약에 주인공이 소년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어떠했을까?

언급했다시피 스포츠 영화에서 해당 스포츠는, 단순한 ‘운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영화의 시작에서 별 볼 일 없거나 심지어 난관에 봉착한 주인공은 스포츠에서 재능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재능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며, 주인공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성공을 거머쥐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스포츠는 주인공이 개인적, 사회적 성취를 이룩하는 기제이기도 한 셈이다. 가령 스포츠 영화의 고전처럼 일컬어지는 록키를 보자. 영화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번번한 직업도 없는 무명 복서다. 하지만 그는 권투에 대한 열정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우연히 당대 챔피언과 맞붙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시합에서 챔피언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 그는 관객들의 인정을 받는다. 여기에서 링은 단지 그가 경기를 치르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아를 사회적으로 확장시키는 관문이 된다.    
 

14살, 자유를 찾아 집을 떠나는 뚤라시 

 

영화 <가볍게, 더 높이>의 주인공 뚤라시의 경우도 다른 스포츠영화와 비슷하다. 그녀에게도 권투는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뚤라시는 ‘달릿’ 출신의 여성이다. 접촉할 수도 없다고 하여 ‘불가촉 천민’으로 불리는 달릿은, 카스트의 모든 계급보다 아래에 있는 계급이다. 이들은 번번한 직업을 구하기도 힘들고, 특히 여성의 경우 결혼 이외에는 정해진 미래가 없다시피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시키고자 했고, 뚤라시는 14살 때 자유를 찾아 집을 나오게 된다. 때문에 역시 그녀에게도 권투는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토너먼트에서 승리해 좋은 직업을 보장하는 정부 프로그램에 참여할 자격을 얻고자 한다. 좋은 직업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줄 것이다. 말하자면 링에서의 그녀의 싸움은 곧 자유를 향한 투쟁이 된다. 이를 반영하듯 뚤라시는 스스로를 ‘한 명의 여성 군대’라고 소개한다. 때문에 영화의 초반은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의 이야기 흐름을 따른다. 뚤라시는 때론 패배하고 좌절하지만, 굳은 의지를 통해 결국 토너먼트의 승리를 거머쥔다.

 

복싱클럽 사무총장, 성관계를 요구하다


하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날 법한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직업을 얻을 국가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선 그녀가 속한 복싱클럽 사무총장의 서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가 서명을 대가로 뚤라시에게 성관계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권투를 시작한 그녀가 그런 제안을 수락할리 만무했고, 그녀는 오로지 실력으로 이 상황을 돌파하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 부조리한 구조 앞에서 정부 프로그램을 향한 그녀의 의지는 좌절되고 만다. 이 지점에서,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스포츠 영화와 이 영화의 차이가 드러난다. 말하자면 처음 질문했던 것처럼, 그 이야기들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남성 주인공들 역시도 갖은 차별과 부조리와 마주하긴 한다. 하지만 그들은 ‘남성’으로서 차별받거나, ‘젠더 차별’에 기초한 부조리에 맞서지 않는다. 그들의 성과 스포츠 공간은 불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뚤라시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오직 선수로서 평가받아야 할 순간에 여성으로서 성적 거래에 응하기를 요구받고, 여성임에 폭력에 노출된다. 즉, 그녀가 받은 차별은 성적이다. 링은 절대 탈젠더적인 공간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뚤라시만의 이야기일까. 사람들은 한국에서 더 이상 여성 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전에 비해 개선된 여성 고용률이나 다양한 분야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보면 언뜻 맞는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 발생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성추행 사건을 생각해 보자. 피해자인 캐디는 골프를 치는 사람을 보조하는 ‘전문 직업인’이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성적 추행’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일터에서,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여성으로서 예기치 못한 폭력에 노출되거나, 혹은 노골적으로 여성의 ‘일’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수행하도록 요구받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항했을 때, 오히려 부당한 처우를 받곤 한다. 다시 말해, 공적 공간은 철저히 ‘젠더’적이며, 젠더 ‘차별’적이다. 뚤라시가 겪은 일은, 지금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다.

 

자신을 가로막는 벽에 대항하는 뚤라시


그러나 영화의 후반, 이야기는 또 한 번의 놀라운 반전을 거듭한다. 뚤라시는 부당한 요구를 수락하거나 혹은 절망에 빠져 주저앉는 대신 또 다른 싸움을 시작한다. 복싱 클럽의 사무총장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것이다. 사무총장은 거액의 돈을 요구하며 소를 취하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따르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듯 복싱 클럽의 다른 여성들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이 녹록치만은 않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그녀는 결혼을 수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유를 위해 싸워온 그녀에게 남편이 억압하는 결혼 생활이 행복할 리가 없다. 남편의 집을 박차고 나온 그녀는 트레이너로서 새 삶을 시작하고,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는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자유로운 새가 된 것이다. 영화 내 불안한 눈빛으로 기차에 실려 다니던 뚤라시는, 끝에 이르러선 스스로 바이크를 몰며 시내를 질주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가 갈 방향을 통제하는 자유로운 여성으로, 뚤라시는 성장한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원하던 자유는 얻었지만 결국 링에서 쫓겨나고, 선수 생활을 접게 된 뚤라시는 결국 패배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그녀가 부조리한 요구를 수락하고 링에 남았다면, 그 만큼 그녀는 자유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부단하게 스텝을 밟아도, 그녀는 부당한 링 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속박당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링 자체를 떠나버린다. 14살 때 집을 나선 것처럼, 그녀의 남편을 떠난 것처럼. 마치 영화 제목처럼, ‘가볍게, 더 높이’ 그녀는 자유를 향해 날아오른 셈이다.


거기다 "내가 권투를 떠나도, 권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권투를 멈추지 않는다. 부당한 링에 속박되는 대신, 자기가 뛸 수 있는 새로운 링을 만들어 내려한다.(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후에 자신의 체육관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만들어낼 공간은 어떤 곳일까. 영화의 마지막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던 뚤라시가 돌아서자, 일을 하던 다른 여성이 미소로 화답한다. 이 장면에서 그 공간이 어떤 곳일지 단초가 보이는 듯하다. 부당한 공간을 박차고 나와, 억압을 뚫고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웃으며 마주하는 공간. 그녀가 만들어내려는 곳은 바로 그런 공간이지 않을까. 언젠가 그녀가 만들어낼 그 곳을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발재간을 멈추어선 안 될 것이다. 뚤라시가 그러했듯 말이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신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