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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위의 여성들] 여성의 몸은 ‘그 배’ 위에서 온전히 제 것이 된다

한국여성의전화 2014. 10. 16. 17:30

 

여성의 몸은 ‘그 배’ 위에서 온전히 제 것이 된다
레베카 곰퍼츠와 그녀의 프로젝트가 전하는 용기와 변화를 말하다

 다큐멘터리 <파도 위의 여성들>-

 

 

 

영화는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발신인은 두려워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수신인은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 발신인은 미혼 임신으로 아이를 낳아선 안 되지만 발신인의 나라에서 낙태는 불법이다. 그녀의 선택지엔 표백제 마시기가 있지만 죽게 될까 무섭다. 그러다 ‘그 배’에 대해 듣는다. 법의 그물에 걸리지 않지만 아이를 지울 수 있다는 ‘그 배’에 대해서.

 

편지의 수신인은 ‘배’(Vessel)를 운영한다. '파도 위의 여성들'은 네덜란드 산부인과 의사 레베카 곰퍼츠(Rebecca Gomperts)가 시작한 프로젝트의 이름이자 국제수역에서 낙태 유도약을 나눠주는 ‘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레베카는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낙태가 법으로 금지된 현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안전하지 않은 낙태’(unsafe abortion)가 여성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상황을 바꾸기 위한 대안을 떠올린다.

 

“한 여성이 받아야 하는 허락이 오직 그녀 자신에게서 유래하는 장소를, 우리는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How could we create a space where only permission a woman needs is her own?)

 

국제수역에선 배에 게양된 국기(flagship) 국가의 법이 적용된다. 레베카의 국적은 네덜란드. 네덜란드에서 낙태는 합법이다. 레베카는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한 배를 각 나라의 법이 적용되는 영해 12해리 밖으로 몰고 나가면 국제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사실, 즉 네덜란드 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그리하여 낙태가 불법인 국가의 여성들을 자신의 배에 태우기로, 그리하여 낙태를 합법적으로 실행하도록 ‘공간을 창조한다’. 다른 어떤 곳도 아닌, 파도 위의 공간은 여성이 마침내 그녀 자신의 허락만을 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프로젝트 '파도 위의 여성들'이 설립된 것은 2000년이다. 설립자 레베카는 배를 운영하고 낙태가 절실한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과정에서 굉장한 언론의 주목과 여론의 질타를 동시에 받는다. 레베카와 그녀를 중심으로 한 '파도 위의 여성들'이 가는 곳은 그래서 언제나 시끄럽다. 폴란드의 항구에 입항할 때는 운집한 군중으로부터 “나치를 환영한다!”는 조소 가득한 인사를 받고, 기자회견장으로 향할 때는 날아오는 계란을 피해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기자회견에서 레베카는 말한다. “폴란드법을 어길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파도 위의 여성들'은 낙태 시술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합니다. 여성과 여러 사람들이 침묵을 유지할수록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낙태를 불법화하는데 성공할 것이며 동시에 여성의 기본적인 의료권을 침해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용감하게 발언하는 레베카 때문에 관객은 매번 두려운 가슴을 쓸어내려야 한다. 저러다가 맞지는 않을까, 괴한에게 습격당하지는 않을까, 배가 폭파당하지는 않을까, 온갖 무서운 생각이 지켜보는 이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지만, 그녀는 결코 움츠러드는 법이 없다. 스페인에선 '파도 위의 여성들'의 배를 쫓아내려고 몇 명의 남성이 그들의 배를 레베카의 배에 묶고 항구 밖으로 몰아가지만, 레베카는 칼을 찾아 묶인 밧줄을 끊어내 버린다. 그리고 그녀를 응원하는 항구의 사람들에게 우아한 인사를 하고 밝게 웃는다. 또, 모로코에선 “생명권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낙태는 배반이다”고 고성을 질러대며 그녀를 매섭게 몰아치는 군중 사이에서, 여성들에게 낙태법을 알려주는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한다. 그녀와 대립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맞서면서, 레베카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소명을 의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나아간다.

 

“제가 배운 것은, 변화를 창조하기 위해선 언제나 공격적인(offensive) 전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폭풍(backlash)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검열(self-censorship)과 같은 것이니까요.”

 

낙태가 불법인 나라에서 여성이 낙태를 하고 그 ‘후폭풍’을 감당한다는 것은 형사처벌을 넘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낙태 여성이라는 낙인과 더불어 사회적인 매장을 모두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변화’를 창조할 수 있기에 앞서, 대부분의 사회에서 임신한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기껏해야 ‘표백제 마시기’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서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이를 낳아 ‘미혼모’라는 또 다른 낙인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미혼 임신’이라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는 아랍권 등의 국가에서 ‘임신 중절’은 선택이 아니라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한 생존권의 발현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여성들에게 ‘임신’이라는 사실 자체는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로 ‘사망선고’인 것이다. 영화 초반부 레베카가 “법과 죽어가는 여성 사이 연결점을 보았다”고 하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진실이다.

 

지금껏 사람들이 낙태 논쟁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여성의 몸은 더 이상 여성 자신만의 몸이 아닌 것이 되었다. 레베카의 프로젝트 '파도 위의 여성들'은 원래부터 여성 자신의 몸이었던 그녀의 몸에 대한 권리를 그녀 자신에게 온전히 돌려주자는 외침이다. 법의 잣대와는 무관하게 늘 발생해왔고 여전히 발생하는 임신과 낙태에서, 그 모두가 일어나고 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최소한의 의료권을 보장하자는 운동이다. 재생산이 일어나는 몸은 여성의 몸이다. 재생산에 대한 권리(reproductive rights)는 따라서 여성 주체에게 있다. 아주 단순하지만, 지루하고 치열하게 이어져 왔던 바로 그 역사적인 싸움의 논리를, 이제 그 싸움의 실질적 주체이자 당사자인 여성이 말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다. 그래서 더 이상 불법적인 낙태 시술로 죽어가는 여성이 없도록 하자는, 또 다른 ‘여성들’이 뻗쳐오는 연대의 손길이다.

 

“법의 목적은 좋은 보건 진료를 (시민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보건 진료’가 법의 울타리 안에서 접근될 수 없다면, 대체 이 법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The intent of the law is to create a good health care. But a good health care is not accessible within the law, then what does this law mean?)

 

낙태를 금지하는 논리, 낙태에 반대하는 논리를 레베카는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파괴한다. 낙태를 금지하든 허용하든, 여성은 계속 임신하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와 금지해야 한다는 무의미한 말의 성토장에서, ‘파도 위의 여성들’은 실질적인 도움을 손길을 이어간다. 그들이 지나온 길 위엔 ‘낙태 합법화’라는 작지 않은 결실들이 맺히지만, ‘파도 위의 여성들’은 이제 ‘법의 굴레’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간다. 여성에게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 그로써 여성이 완전한 주체로,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Vessel)이 전해주는 용기와 변화의 메시지다. 보는 내내 가슴이 쿵쾅대는, 레베카와 그녀 ‘여성들’의 지난 여정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여기 있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오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