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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번째 화요일/마이 차일드] 나는 당신과, 당신 곁에 있는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여성의전화 2014. 10. 17. 11:19

 

나는 당신과, 당신 곁에 있는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52번째 화요일> <마이 차일드> 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

 

 <52번의 화요일>

 

성별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벗어버리기 힘든 짐을 안고 살아간다. 선택의 여지 없이 세상의 빛을 마주하는 순간-혹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단순히 신체 구조를 가지고 여자, 남자로 구분되고 규정된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이, 성별은 선택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 규정되어 그렇게 교육받고, 길러진다.


여자 혹은 남자로 구분된 아이는 이 사회의, 가장 가깝게는 부모의 양육방식에서부터 여자, 남자의 구분을 습득하고, 이에 맞게 살아가게 된다. 마치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여자와 남자의 역할, 선호, 놀이 등은 자연스러움 속에서 강요되고, 어느새 익숙해져 습관처럼 스스로도 구분을 하고, 통제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살아야만 배제되지 않고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이분화된 성별의 구분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세계에서 다른 생각을 품고 움직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알을 깨고 나오듯, 스스로가 익숙함을 깨고 나오지 않는 한 모든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설사 다른 생각을 하고, 알을 깨고 나온다 하더라도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까지, 이 세계는 어떤 실마리도 던져주지 않은 채 나 홀로 어둠 속에 서 있는 것과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과정을 겪어내야 한다. 


여기에, 이성애 중심의 세계는 성별의 구분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다. 무엇이 먼저랄 것도 없이, 이성애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삶을 관통하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 성별이 나뉘어지고, 성장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요소들은 이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규범 아닌 규범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단란한 가족의 탄생이 세계를 지속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성별구분과 이성애 중심의 세계에서 내가 다른 욕망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는 순간, 세계에 발딛기는 쉽지 않다.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각각의 요소들은 성별의 구분과 동시에 이성애 중심의 사고 및 문화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52번째 화요일> 그리고 <마이 차일드>

 

개인적으로 <52번째 화요일> 과 <마이 차일드>를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나의 직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분화된 성별의 구분, 이성애 중심적인 문화, 그리고 이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수 많은 존재와 가치들을 배제하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이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차원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본인, 중심에서 벗어나 배제되어 버리는 그들이 아닌, 그들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보고, 느끼고자 한다.  


이 영화들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소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부모가 혹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에 균열을, 커다란 의문들을 가져다 준다. 모른 체 하고 싶었던 것들,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상관없는 것이라 했던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어느 순간 섬광처럼 번쩍이며 다가온다. 이 순간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이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탐정이 된다

빌리가 '그녀 혹은 그'를 지켜보는 시간


<52번째 화요일> 은 여성이자 엄마라는 일종의 역할 규범 속에 있었던 제인이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남성으로서 변화하는 과정을 여성이자, 딸이라는 역할에 있었던 빌리가 지켜보는 시간들을 담은 영화이다. 분명 이성애적 구도에서 태어난 빌리의 삶에는 엄마와 아빠라는 역할이 존재했다.


비록, 엄마와 아빠는 아주 어릴 적 이혼하여 분리된 채 살았지만, 빌리의 삶에서 부모는 내 눈 앞에 있는, 만질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엄마인 제인이 성전환 수술을 하겠다는 말과 함께 빌리와 잠시 분리되어 살자는 전언을 한다. 이성애적 구도에서, 엄마와 아빠라는 역할이 분명하게 지속되었던 가족 안에서 엄마가 남성으로 성전환수술을 하겠다는 말은, 그 아이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자신이 흔들리게 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자연스러움과 익숙함 속에서 유지되고 있던 자신의 위치, 역할, 성별에 대한 규범이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문제, 엄마를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여기에는 꽤나 의미심장한 곡선이 존재한다. 엄마를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 고민은, 당연시 되었던 생물학적인 성별에 대한 규범에 대한 의문, 빌리가 제임스에게 물었던, 만나는 상대가 레즈비언이냐 이성애자냐 하는 의문에 끼어있는, 엄마가 아빠로 변하면서 성적 지향성의 이동에 대한 의문 등과 같이, 기존의 이성애적 구도의 가족에서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들과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한다. 엄마가 남성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자신의 정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빌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트렌스(Trans)’, 즉 횡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모델을 앞에 두고, 카메라를 든 빌리는, 결국 자신 역시 자신의 정체에 대한 지독한 탐정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제임스가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가며 자신의 변화, 횡단하는 과정을 확인하듯이 빌리 역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존재를 앞에 두고, 이성애적 환상과 마주하며, 카메라에 담긴 자신이든, 타인이든 시선을 둔 채, 자신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마이 차일드>


<마이 차일드> 는 아무래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성소수자(LGBTQ)의 정체성을 가진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카메라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자신과 자신의 아이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설명할 수 있는 부모들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여기까지 온 자신들의 여정을 다시 이야기할 때 그들의 얼굴에 슬픔과 절망이 묻어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아이가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것을 몰랐던 때에, 의심을 한 기억을 전한다. 그 의심이 현실이 되어, 그들은 만감이 교차하고 부정에 부정을 겪어도, 나의 아이의 정체성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가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말을 하든, 하지 않든 역력하다.

    
부모가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게이 등 성소수자(LGBTQ)의 정체성을 가진 자신의 아이들을 바라볼 땐, 이성애적 구도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아이들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의 탐정놀이가 시작된다. 탐정놀이라는 말이 거칠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은유일 뿐이다. 어떠한 겪어냄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올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을 넘어서, 횡단을 하고, 진정한 전환, 변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을 설명하기 위해, 나를 설명해야 한다

성적 지향성과 젠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이야기


<52번째 화요일> 에서 빌리는 제인에서 제임스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서, 또 다른 카메라로 자신의 성적 지향성과 젠더 정체성에 대한 교차로를 담는다. 자신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가며, 수많은 갈등들과 부딪치게 되고, 제임스와도 갈등을 빚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정체에 대한 빌리의 횡단은, 어쩌면 제임스, 엄마에서 아빠로 변화하는 존재를 스스로 납득하고, 설명하기 위해,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린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고용된 탐정인, 자신이자 카메라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게 해주는 하나의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정을 통해, 빌리는 제임스에 대한, ‘준비’된 마음을 갖게 된다. 


<마이 차일드>에서의 탐정놀이는 뜻밖의 가능성을, 빛을 볼 수 있게 한다. 부모들이 알 수 없었던 세계에 대해 실마리를 찾는 여정에서, 오히려 그들은 나와 닮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 나와 그 사람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을 분리되어 바라볼 수 있게 되며, 서로에게 위안을 얻고 치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와, 나와 유사한 상황을 가진 또 다른 얼굴의 당신을 마주보며, 자신의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삶에 대해, 더 나아가 모든 나의 아이들과 같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게 된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의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신의 아이들을 설명하고,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이러한 아이들을 가진 자신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이토록, 사소하고 은폐된 사적인 역사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때, 이는 더 이상 사적인 것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다. 빌리나 <마이 차일드>의 부모들이나, 이제, 더 이상 이전의 가족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마주한 새로운 의미의 가족의 재탄생을 축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설명해야 하는 이 사람은 나의 부모이며, 나의 아이들일 뿐이고 나는 그의 딸이며, 그의 부모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 세계에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나와 당신을 긍정한다

<마이 차일드>의 부모들이 새로운 움직임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처럼

<52번째 화요일>의 빌리가 새로운 준비를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혼란과 절망, 고통 후에 오는 일종의 긍정인 것이다. 이 긍정은, 나에 대한 긍정에서, 모든 것이 흔들릴만한 균열의 언어를 뱉어낸 아이와 부모로 나아간다. 부정은 반대로 이루어지지만, 긍정은 아프게도 자신에 대한 긍정부터 시작되어야 아이와 부모에 대한, 타인에 대한 긍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여정을 떠나야, 나의 부모와 아이를 설명할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52번째 화요일>의 제임스, <마이 차일드> 의 부모들의 아이들, 본인 자신도 자신에 대한 언어를 찾기 위해 얼마나 긴 여정을 했을까. 그 여정 안에 깊숙이 베어있을 고통과 혼돈 그리고 절망들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다른 타인의 얼굴과 마주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여는 것처럼, 이를 곁에서 보고 있는 누군가 역시 이 사람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이 사람의 곁에 있는 사람인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각각의 여정 속에서, 존재들은 부딪치기도, 자연스러움이 베어있는 편견으로 인해 침묵하기도 한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괴로움으로 수많은 갈등과 모순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겪어냄의 여정이 힘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긍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긍정은 굉장히 쉽게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다리를 건너야만 보일 수 있는 빛이다. 깊고 깊은 바닥에서 빛이 있는 곳으로 오는 과정은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변화와 전환을 통한 긍정은, 힘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길을 창조할 수 있다. <마이 차일드>의 부모들이 새로운 움직임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처럼, <52번째 화요일>의 빌리가 새로운 준비를 하는 것처럼.    

 

어쩌면, 긍정을 통한 모든 힘들이 모여, 서로 엉켜 춤을 추면서 당연시되고, 자연스럽다고 여겨왔던 익숙함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지금 그 어디라도 낯선 곳이 될 수 있게 하는 찬란한 생의 움직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또한 그것이 낯설었던 무언가를 익숙하게 하고,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힘이자, 새로운 빛이 될 수 있다는 작은 마음을 내비쳐 본다.


어느 시절에, 친구에게 이 세상에 우리 둘, 발 디딜 곳 하나 없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발 디딜 곳을 찾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세상 속에 살면서 느꼈지만, 이러한 영화가 주는 알싸한 빛이 어쩌면 우리 모두, 그 무엇도 상관없이 발 디딜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미친 척하고 희망을 갖는 것도 가끔은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 희망은,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 다시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하겠지만 말이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유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