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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그 이후의 삶

한국여성의전화 2017. 9. 20. 13:33

폭력, 그 이후의 삶

- 국내작 <김장>, <손의 무게>, <미열>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린

피해자에게 굴레를 씌우는 사회

스무 살 무렵 수업 과제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형상화 방식과 그에 따른 2차 가해’라는 주제의 보고서를 썼다. 이 보고서를 쓰면서 이 사회 전체가 2차 가해에 큰 몫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피해자의 삶은 계속되고, 그들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상처를 안은 채로 계속 살아가는데, 사회에서는 온갖 잔인한 표현을 쓰며 피해자에게 굴레를 씌우고 있었다. 결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충격적인 ‘흥밋거리’에 불과한 것처럼도 보였다. 표현하는 방식이 어딜 가나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가해자와 철저히 수동적인 피해자, 그리고 피해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까지. 현실에서는 가해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평범한 사람인 경우가 많고, 피해자의 삶은 계속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최근 개봉한 <청년경찰>, <VIP> 등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중대한 범죄를 너무 세세하게 묘사하고 단순한 소재로 소비해버렸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면,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김장>, <손의 무게>, <미열>, 이 세 작품은 여성들의 피해 그 이후의 삶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영화인 셈이다.


<김장>, 겉으로는 평화, 깊어지는 상처



<김장>에서 주인공 영주는 김장 때문에 친척 집에 갔다가 성폭력 가해자인 이모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영주는 가해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불편해하지만, 정작 가해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집 안에 머물지 못하는 영주를 자주 비춘다. 영주가 없는 집안은 화목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피해자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가해자를 피해 다녀야 하는 상황은, 친척 사이에 일어난 성폭력이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작품을 보면서 가족 내 성폭력을 다루었던 다큐멘터리 <잔인한, 나의 홈>이 떠올랐다. 이 다큐 속에서는,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다른 가족에게 털어놓자 ‘너만 조용히 하면 우리 가족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가정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이렇게 가정 속 폭력은 쉽게 은폐된다. 영화 내내 영주를 옥죄어 오는 반쪽짜리 평화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아니면 실체를 드러내게 될까?


<손의 무게>, 너무나 일상적인 폭력



한국 사회의 데이트폭력에 관한 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데이트폭력의 피해를 보았다는 말에 ‘어쩌다 그런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라고 반응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는 ‘누가 봐도 특출나게 비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사람인 경우가 많은데도 말이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났든지 간에 그 사람을 만난 피해자가 아니라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에 전적인 잘못이 있지만 사회는 흔히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손의 무게>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던 고등학생 연인에게 사실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데이트폭력 가해자가 겉으로는 누구보다 애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또 이로 인해 데이트폭력 자체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피해자가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는 경우도 있음을 시사한다. 연인의 일상을 감시하고 간섭하는 것이 낭만적인 연애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데이트폭력 피해자에게는 피해를 피해라고 말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미열>, 이제 곧 열이 내릴 거야



영화는 남편과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은주가 오래전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자의 검거 소식을 듣는 데서 시작된다. 성범죄 피해자의 상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미열이 잘 돌보고 쉬게 하면 금방 내리듯이, 상처를 극복할 방법도 분명히 존재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이 영화가 성범죄를 비롯한 많은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열이 오른 것처럼 힘들지 몰라도 다시 또 괜찮아질 수 있을 거란 희망 말이다. 어쩌다 상처가 덧나 아플 때도 있겠지만, 곧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영화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한국 미디어에서 피해자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방식 대신, 세 작품은 아픔을 잊기도 하고, 고통에 빠져들기도 하는 피해자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 여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몇몇 장면에는 진심으로 화가 나기도 했고, 결말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본 후 ‘그래도 삶은 지속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폭력을 당한 이후 완전히 삶이 끝난 것처럼 그리는 기존의 미디어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지금도 많은 여성이 힘들었고 끔찍했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