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뷰어

나누고, 싸우고, 이기는 ‘말하기’

한국여성의전화 2017. 9. 22. 23:34

나누고, 싸우고, 이기는 ‘말하기’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말하기의 힘> 피움톡톡


린 여성인권영화제 기자단

9월 22일, CGV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말하기의 힘> 상영 후 피움톡톡이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영화 제목과 같은 ‘말하기의 힘’을 주제로, 재재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 국장과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함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과 함께 나누었다.

<말하기의 힘>은 브라질에서 진행되었던 ‘말하기의 힘(FACES OF HARASSMENT)' 캠페인을 주제로 한다. 영화는 참여자와 촬영 장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26명의 여성의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영화에 담긴 증언은 일부고, 실제로는 140명의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으며, 이후에도 더 많은 여성이 캠페인에 참여했다고 한다. 영화의 구성은 무척 단순하다. 상영 시간 내내,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를 말하고, 그 피해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털어놓고 자리를 떠난다.



간섭 없는 ‘말하기’

한 시간이 넘게 이어지는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울거나 말을 잇지 못하는 여성들을 보며 가슴이 아프기도, 내가 겪은 비슷한 경험이 떠오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 공간에서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저런 기회가 있었다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실컷 울 수 있었을 텐데 싶어 부럽기도 했다. 성폭력을 당했을 때, 그러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 자체도 힘들었지만, 주변의 반응 역시도 상처가 될 때가 많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뭐 그렇게 사소한 거 가지고 그래?”, “왜 그렇게 예민해?” 같은 반응들.

피해자의 목소리로

피움톡톡에서는 많은 관객이 공감되었고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한 관객은 “우리가 좀 더 쉽게 우리의 경험을 말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브라질 다큐멘터리지만, 한국 여성으로서도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부분이 많았다는 반응도 이어졌다. 한 관객은 “중간에 경찰관이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피해를 부정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최근에 국회의원이 ‘젠더가 뭐냐’고 질문했다는, 그런 이야기도 생각나며 겹쳐 보였어요. 경찰관이나 국회의원처럼 이런 문제를 사법적으로 해결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젠더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교육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매 부소장은 “이 영화의 원제가 <FACES OF HARASSMENT>인데, 여기서 ‘face'라는 단어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민낯, 실체적 진실을 고발한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피해자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인가’는 질문에는 “저희가 2003년부터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열었는데, ‘말하기’를 위해서는 들을 사람의 존재, 태도, 그리고 들을 시간과 공간의 확보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라며 “요즘 드는 생각은, 듣기 참여자의 태도에 대해서 피해자가 ‘그렇게 들으면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들어볼 가능성도 있겠다 싶더라고요.”라고 마무리했다. 한 관객은 “말하기에 어떠한 방식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는 듣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재재 국장은 “스스로 자유롭게 피해를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기회를 주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더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영상 제작 공부 중이라고 밝힌 한 관객은 “요즘 보면 영화에서 성폭력을 묘사하는 장면이 성적으로 소비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렇게 피해자를 성적인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오매 부소장은 “영화 등에서 피해자를 묘사할 때 역시 피해자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담는 게 아니라, 이야기 맥락을 잘 살리는 노력, 즉 피해자의 존엄을 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라며 피해자 자신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한 관객의 “말하기가 단순히 말하기로만 끝나지 않고 사회 변화로 이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재재 국장은 “해시태그 운동들도 그렇고 ‘말하기’를 아카이빙하고, 이 영화처럼 기록해서 사회 구조까지 지적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말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의심받는다. 그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라는 요구에 많은 피해자는 침묵 속에 갇히곤 한다. 영화는 그 침묵을 깨뜨린 결과를 보여준다. 오매 부소장은 “이 영화처럼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반성폭력 운동을 하면서 피해자에게 힘이 생겼다고 느낄 때,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공감해줄 때, 작게나마 이겼을 때 등 ‘이런 운동을 하길 잘 했다’ 싶을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런 순간을 위해 우리가 말하고, 또 듣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재재 국장은 “더 많은 사람이 ‘말하기의 힘’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피움톡톡을 마무리했다.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말하고 또 듣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강요된 침묵 대신 힘 있는 말하기를 택하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러한 변화를 향한 희망을 준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관객들의 모습에도 힘이 실린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