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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내는 새벽의 영화 - <여자의 아내>, <선화의 근황>, <신기록>, <골목길>

피움 한국여성의전화 2018. 9. 14. 02:19

이겨내는 새벽의 영화

<여자의 아내>, <선화의 근황>, <신기록>, <골목길> 


                         한국여성의전화 8기 기자단 한지원


밤의 시간이 지나고 다가오는 새벽

제12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여자의 아내>, <선화의 근황>, <신기록>, <골목길>은 단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 러닝타임을 가득 채운다. ‘나’와 ‘너’의 관계,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이루는 최소 단위의 관계인데도 때때로 매우 버겁게 느껴지곤 한다. 각 영화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작중에서 차별받는 피해자 혹은 소수자들과 감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인물이지만, 숨겨왔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가장 낯선 타인이 된다. 사랑했던 남편은 MTF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을 공공연히 드러내려고 하고(<여자의 아내>), 성차별적인 직장 안에서 유일한 동지였던 이와는 밥그릇 싸움에 던져지며(<선화의 근황>), 우연히 마주친 낯선 중년여성의 삶은 평범했던 일상에 묘한 불안감을 안겨주고(<신기록>), 친한 친구라고 규정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문영의 커밍아웃으로 혼란에 빠진다.(<골목길>)

네 편의 영화는 안정적인 밤의 시간을 지나 새벽의 시간에 도달하는 이야기다. 밤은 익숙한 어둠 안에 비밀을 꼬깃꼬깃 숨겨 놓는 시간이지만, 새벽이 되고 그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새벽 볕에 완연하게 드러난 ‘나’와 ‘너’, 그 사이에는 언제나 메우지 못할 균열이 존재한다. 이 네 편의 영화는 소수자 혹은 피해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 균열을 버텨내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연대하는 순간의 이야기다.


<여자의 아내>, 이해할 수 없어도,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해한다는 말이 그렇게 쉬워요? 왜 다들 잘 안다는 듯이 얘기해요?”

은경은 영화의 첫 시퀀스부터 계속 화가 나 있다. 사랑했던 남편 성훈이 트랜스젠더인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은경의 ‘일상’은 하루아침에 ‘비일상’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은경이 멀찍이서 성훈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맞추고, 그녀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천천히 받아들이면서 고통스러운 비일상은 ‘완전히 새로운 일상’을 향해 나아간다. 



<선화의 근황>, 그 무엇도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주인공 선화가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빵 공장의 공기는 숨이 막히는 듯하다. 20대 사회초년생 여성인 이들이 직장에서 받는 차별은 그들이 들어 옮겨야 하는 포대자루만큼의 무게로 상징된다. 카메라는 그들이 어깨와 손목을 혹사하며, 비틀거리며 포대를 옮기는 모습을 담담히 지켜본다. ‘나 사회생활 못하는 것 같아.’ 공장에서 유일하게 선화가 의지할 수 있는 상대인 진경은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 ‘사회생활’의 기준은 과연 누구에게 유리하게, 누구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진 것일까. 영화는 그 질문을 관객에게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



<신기록>, 서로를 붙잡아주는 새로운 기록이 되어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꽉 쥔 주먹과, 팽팽하게 긴장된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끝. <신기록>은 절박하게 움켜쥔 손의 이미지로 일상 속 연대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들이 운동장에서 만나 서로의 이야기와 기록들을 나누는 순간, <신기록>의 일상은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서로의 삶을 붙잡아 주는 ‘새로운’ 연대의 ‘기록’으로.



<골목길>, 지금 걷는 길은 내가 선택한 길일까, 누군가 정해준 길일까

우리는 흔히 10대 청소년들에게 무수히 많은 길과 선택지가 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상투적인 말에는 한 치의 허점도 위선도 없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상 ‘적당한 직장에 들어가 적당한 돈을 벌며 적당한 이성을 만나 사는 것’으로 요약되는 ‘정해진 길’만을 걷고 있거나, 걸으려고 한다. <골목길>은 학교라는 호모포빅한 공간에서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자각하는 문영,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친구 은재를 통해 이 ‘정해진 길’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야기한다. 어떤 길은 지름길이지만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고, 새로운 길은 편안하지만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문영과 은재는 중요한 건 발에 딱딱하게 닿아오는 길이 아니라, ‘함께 걸어갈 사람’임을 깨닫는다. 그 사람과 걷는 곳이 곧 그들만의 길이 된다.


이겨내는 새벽, 그리고 다가오는 아침

9월 13일 오후, 영화상영 후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도 이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여자의 아내>의 장아람 감독은 영화 자체가 ‘성 소수자의 주변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며 성 소수자가 주인공인 영화도 있지만, 가족 또는 연인과 같은 주변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바라보아야 그들을 둘러싼 관계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답했고, <선화의 근황>의 김소형 감독 역시 영화를 통해 ‘선화의 선택에 진경이 영향을 미치고, 진경에게 영향을 받는 선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주인공 선화가, 차별에 맞서 싸우려 했던 진경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현실적인 결말로 마무리했다고 전했다.  


<골목길>의 오수연 감독은 은재와 문영을 각각 ‘바라보는 사람’과 ‘바라봄을 당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고, ‘바라보는 사람’인 은재의 시선을 통해서 문영에게 은재가 ‘곁에 한 명만 남아 있으면 살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사람으로 남길 바랐다고 연출 의도를 전했다. 

영화들은 이처럼 다양한 삶의 궤적들을 통해 일상 속 작은 연대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자의 아내>, <선화의 근황>, <골목길>처럼 모든 것이 숨겨진 ‘밤의 시간’을 거부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피해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견딤으로써 ‘이겨내는 새벽’을 맞게 된다. 그렇게 차별과 혐오에 맞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다 보면 결국, 서로가 서로의 삶을 붙잡아 주는 <신기록>의 아침이 찾아오지 않을까.


※ 본 기사에 언급된 '이겨내는 새벽'은 <내일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전시회에 전시된 부농작가님의 <이겨내는 새벽>에서 착안한 것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