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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t Body (In)visible], [Life Model] 몸의 잃어버린 서사를 재구축하기 위하여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22. 02:51

몸의 잃어버린 서사를 재구축하기 위하여 / <The Fat Body (In)visible>, <Life Model> / 12.09.21  




  모든 몸은 다르며 다양하다는 말은 실재하는 몸은 없다는 말과 다름 없다.

  모두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말이 개성은 없다는 말과 동치이듯.

 

  다양성을 존중하라, 이것은 문화에서 보편적이고 정언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정말로 다양함 혹은 다름은 인정받는가?

  개인의 몸은, 실재하는가?

 

  ‘-였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몸에 한정되어서 특히 많이 쓰인다.

  ‘키가 5cm만 더 컸으면 좋겠다,’ ‘살이 5kg만 더 빠졌으면 좋겠다,’ ‘얼굴이 조금만 더 작았으면 좋겠다,’ ‘눈이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 ‘턱이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좋겠다,’ ‘피부가 조금 더 좋았으면 좋겠다,’ ‘뱃살이 좀 들어갔으면 좋겠다,’ 등등등. 익숙하게 듣고, 또 내뱉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은 현재의 몸을 부정하는 말들이다.

  나의 몸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몸보다 키가 작고 살이 쪘으며 얼굴이 크고 눈이 작고 턱이 튀어나오고 피부는 지저분하고 뱃살은 늘어진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환멸을 느낀다. 어제보다 살이 빠졌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는 있어도 내 몸 자체를 완벽히 긍정하기는 힘들다. 정상체중 혹은 저체중인 여성들까지 자신이 남들보다 살이 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혹 자신의 몸에 만족하는 경우라면 글쎄. 팔을 높이 높이 들어 턱이 갸름하게 나오게 셀카를 찍고 얼굴형과 피부와 눈 크기를 어플로 보정한 다음 원본을 지우고 나서야 나도 좀 괜찮은데?’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미 그 사진 속의 나는 내가 아니게 되었음에도.

 

  지향하는 몸, 이상적인 몸만이 존재한다. 비록 관념뿐일지라도.

  실재하는 몸의 서사는 매순간 삭제당한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잔인하게도

 

  인간이 아닌 몸이 된 기분이다.” -<The Fat Body (In)visible> 중


  

(나도 비키니가 입고 싶다 ⓒ시로 / 여성주의저널 일다-시로의 방에서 가져옴)


 

  남들보다 조금 큰 여성Plus-size-womanJessica는 자신이 과도하게 가시화hyper-visible되거나, 혹은 비가시화invisible된다고 이야기한다. 길을 걷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뚱뚱한 년이라고 욕지거리를 듣는 경우가 있는 반면, 오직 사이즈가 맞는 옷을 사기 위해 줘도 안 입을 것 같은 옷들만 파는 매장을 찾아야 한다

 

  나는 34인치 바지를 입는다. 물론 남성복 매장에 가서 구입했다.

  바빠서 하루에 한 끼밖에 못먹고 잠이 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시리얼을 퍽퍽 퍼먹었다. 아니다 다를까 엄마가 살쪄-’라고 소리를 지른다. 머리를 노랗게 탈색하고 집에 왔더니, 살이나 먼저 빼라고 한다. 네 머리색은 예쁘지만 너보다 15kg 날씬한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머리라고. 길에서 문득 얘기한다. 넌 너무 심하다고, 길 가는 사람들을 보라고, 네가 정상인 것 같냐고.

  정말이지 이건 너무 심하다. 나는 시리얼을 먹고, 머리를 탈색하고,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아니, 사실 그런 이유로 나에게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모든 비명의 책임은 나의 살들이다. 그리고 이 살들을 나의 몸이다. 내 마음이나 정신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매 순간 치열하게 인식하는 나의 몸이란 말이다.

  나도 소리지르고 싶다. 내 몸이 뭘 그렇게 잘못을 했느냔 말이다!

 

  “거울 앞에 서면 나만 보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 나는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된다.” - <Life Model>


  

<Life Model>, Lori Petchers

 

 

  <Life Model>에서는 75세 여성의 독백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솔직히, 옷을 입고 있으면 더 어색해-라는 말로 영화는 시작한다. 자신의 몸과 누드모델 일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말들이 계속된다. 애정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녀에게 몸은 삶 그 자체이다. 그녀의 압도적인 동작을 보며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려지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의 어떤 긴장과 교감이 작업실에 가득하다. 말간 얼굴에 또렷한 눈동자로 그녀가 렌즈를 쳐다볼 때, 나도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그녀 앞에 앉아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벗고 있는 사람의 몸이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이 아름답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단지 알몸을 드러내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그리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였다. 멋대로 처진 젖가슴과 늘어진 뱃가죽과 종아리가 부드럽고 단호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건 내 몸이라고, 사랑스러운 내 몸이라고. 앉거나 엎드리는 동작도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강력해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The Fat Body (In)visible>에서 Keena 5kg으로 태어나 한번도 뚱뚱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고 한다. 흑인 여성으로서 삶을 경험하던 그녀는 나이를 먹으며 뚱뚱한 흑인 여성으로서의 기억을 쌓아간다. 자신이 조금 더 크다는 이유 만으로 비행기에서 위험물 취급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녀가 끼워 맞춰지는순간들을 상상한다. 멋대로 그녀를 과도하게 가시화하거나 비가시화하는 사회의 기준이 그녀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가오는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몸은 끊임없이 배제된다. 그럼에도 Keena는 접히는 턱살 사이로 고이는 눈물을 계속 흘려 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해요.” 라고.

 

  영화를 보고 패널분이 이런 말씀을 했다. 모든 바라보기는 훈련의 결과이며 나와 타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고. 몸으로 봐주지 말고 인간으로 봐주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글쎄, 사실은 동의할 수 없었다.

  정상성을 벗어난 몸, 삭제당하는 몸의 서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몸을 아예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몸을 만지자는 것이다. 손 끝의 감각으로 몸의 실재의 근거를 얻을 수 있게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뚱뚱한 여성이 미의 기준이던 때도 있었다, 미의 기준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오해하지 말지어다. 젊고 날씬한 것이 미의 기준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의 기준이 고정적이기 때문에 이 모든 배제와 삭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름답다. 나의 몸도, 너의 몸도.

  이 말이 당위가 아닌 경험으로 모두에게 항상 간직되길.

  따라서 우리의 몸들은 접혀지는 살과 살로 맞닿을 수 있기를.  




* 살 찐, 그래서 아름다운 : http://adipositivi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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