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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음악, 공감, 소통 - 「새래바Sarabah」, 글로리아 브래머, 마리아 L 갬베일, 2010

피움 2012. 9. 25. 12:07

 

 

상처, 음악, 공감, 소통 - 새래바Sarabah, 글로리아 브래머, 마리아 L 갬베일, 2010

 

 

 

(sisterfa.com)

 

 음악은 힘이 세다. 그리고 시스터 파는 음악으로 말한다.

 예술은 일단 감정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길들여져 온 생각과 반대되는 의견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생각과 행동을 부정하고 싶기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 특히 논리의 언어가 아닌 리듬과 멜로디가 있는 음악은 이성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물론 음악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아닌 학자들의 일이므로 여기서는 제외 하겠다-. 그렇기에 음악을 통한 공감은 어렵지 않다. 또한 누군가의 장황하고 긴 연설은 따라할 수 없다. 감동을 받거나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모든 말들이 머리에 남기란 힘들다. 그러나 음악은 몇 번 듣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뿐만 아니라 음악은, 그 멜로디와 리듬에 같이 몸을 흔드는 순간 음악가 뿐 아니라 그 모두의 것이 된다.

 

 세네갈의 시스터 파가 하는 말들이 힘이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여성할례의 희생자인 그녀는, 세네갈을 돌며 여성할례 근절을 말한다. 그녀의 노력은 결국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이고 그녀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큰 결실을 얻는다. 애초에 금기시 되어 이야기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당당히 표면으로 꺼내 마주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녀의 노력이 사람들을 움직였던 이유는, 그녀는 음악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노래하고, 또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음악으로 모두와 나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여성할례 근절을 내용으로 스스로 노래하는 부분은,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예술의 힘이 물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시스터 파의 경우는 그 무서운 힘이 무섭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쓰인 듯 하다. 물론 그녀가 얻은 결실이, 모든 일상의 순간들에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민족들이었기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녀에게 여성할례는 그녀의 잠재의식 깊숙이 묻혀있는 상처였다. 그러나 그녀가 이를 극복하고 다른 소녀들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말아야 한다고 당당히 말하면서, 그녀 스스로 치유 받고 있음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말로써만 여성 할례 근절을 이야기 했다면, 그리고 여성 할례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이가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지금 세네갈에 살고 있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들을 계몽시키려고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계몽과 설득은 분명 다르다. 계몽은 강요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강요에는 당연히 저항이 따라 나온다. 현실에 문제를 직면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정정하려 할 때 나는, 그리고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는 비논리와 침묵으로 무장된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향해 아무리 말하고, 또 말해도, 말하고 있는 내 자신이 지치는 경우는 허다하다. 시스터 파를 힘들게 만드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실 시스터 파의 상처는 그녀 혼자만의 상처가 아니다. 때문에 누군가 말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말조차 불가능한, 표면위로 말이 떠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 그래서 그녀는 노래한다. 말의 논리를 거부하기에 그녀는 다른 논리를 가져온다. 음악과 공감이라는 논리를.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계몽인가, 설득인가, 아니면 단순한 의견제시인가? 새래바에서 그녀의 상처와 진심이 담긴 음악은 이 딜레마를 뛰어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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