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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디라트와 하프사트] 지향을 파괴하고 창조하라, 하프사트

한국여성의전화 2014. 9. 27. 01:18

지향을 파괴하고 창조하라, 하프사트

 

 

다큐멘터리 <쿠디라트와 하프사트> -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쿠디라트와 하프사트> 스틸컷

 

학부 심리학 교양수업에서 재밌는 실험을 한 기억이 있다. 사람은 반드시 어떠한 지향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험이었다. 예를 들어, 짧고 긴 거리로 점(dot)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잇고 싶어하고 또 실제로 잇는다는 것이다. 어떤 방향이든 어떤 모양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당신이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그 점들을 잇고 있다는 것. 생각하지 말라는 코끼리를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잇지 말라는 점을 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교수가 어떤 실험인지 알려주기 전에, 우리 모두는 이미 마음 속에 각자의 점들을 잇고 있었으므로.

 

지향으로의 욕망은 규정으로의 욕망과 필연적으로 맞물린다. 점을 이어야 편안한 것처럼, 사람들은 무엇이 되었든 규정을 내려야 편안함을 느끼고 의미를 발견 혹은 재확인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규정 불가(不可)’여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기존 규정 방식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아 외면 당하기도 한다. 이런 순간 우리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우리가 지향과 규정을 포기하는 순간 낯설고 이상한것들로 ()규정되기 십상이다. 선천적이고 습관적인 지향성과 규정성은, 그래서 때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크게는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익숙하게 사람()’을 규정했던 남자라는 지향성의 관점에서 여성이라는 사람이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 익숙하게 사랑()’을 규정했던 이성애라는 지향성의 관점에서 동성애라는 사랑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다.

 

<쿠디라트와 하프사트>는 지향/규정에의 욕망을 깨뜨려주는 영화다. 500여개 언어, 3개 이상의 민족구성,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공존 등 나이지리아라는 국가 자체도 규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나라의 민주화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에서 지향/규정에의 어려움을 겪게 한다. 그런데 이런 지향성과 규정성의 파괴는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민주화를 연상할 때, 우리는 지레 선두에서 투사로 선 남성만을 상상하지 않았던가. 민주화의 한 축에 여성이 늘 거기 자리하고 있었음에도, 여성이 주()가 되는 민주화 운동을, 여성이 선봉에 서는 민주화를 우리는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이지리아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대통령직에 당선된 아버지 모슈드 아비올라가 당선 한달 만에 군부에 의해 수감된 후, 어머니 쿠디라트 아비올라에 이어 하프사트 아비올라가 나이지리아의 민주화를 위해 수프림 프라이스’(목숨)를 지불하면서 일했고 또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꽤 놀라운, 그리고 또 아름다운 사실로 영상에 담겨 전달된다.

 

쿠디라트 아비올라와 하프사트 아비올라는 머리 위로 아름다운 천을 말아 올리고 민주화 실현이라는, 군부독재와의 전쟁에 임한다. <쿠디라트와 하프사트> 중간 중간에 삽입된 하프사트 머리 위로 천이 아름답게 쌓이는 장면은 관객의 눈을 그때마다 사로잡는다. 이 장면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하프사트가 일상적으로 마주한 전쟁이 삶-죽음의 문제로 환원되는 실제적 전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전쟁에 나서는 남성들의 무장은 주로 총이나 군복 등으로 이미지화되어 있지만 하프사트의 무장은 총이나 군복 등이 아닌 아름다운 어떤 것(선명한 하늘색의 천이라든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쿠디라트와 하프사트 모녀 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의 여성들은 가게문을 닫고, 시장영업을 중지하고, 나체로 길거리에 나와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임한다. 쿠디라트 아비올라는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 이런 나이지리아 여성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오랜 기간의 군부독재로 부패한 나이지리아 정권은 국민들의 오랜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민주 선거를 열겠다고 발표하고, 모슈드 아비올라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다. 모슈드 아비올라의 당선까지는, 그의 아내이면서 조력자인 쿠디라트 아비올라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모슈드가 전국민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전국의 수많은 여성들과 결혼하고 성관계를 맺고 55명인지 56명인지도 모를 자식을 낳았을 때도, 쿠디라트 아비올라는 그의 곁에 남아 그를 도왔다. 일부다처제에서 한 명의 ()’를 둔 여러 ()’들의 경쟁은 일부다처제라는 제도와 그 제도를 향유하는 ()에 의해 격려되고 조장된다. 일부다처제 하에서 여성들의 연대는 꿈꾸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자식들이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른 처들과의 경쟁,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모슈드를 떠나지 않았다는 쿠디라트는 사실, 모슈드 수감 이후 나이지리아의 실질적인 민주화를 주도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면에 나서서 용감하게 발언하는 쿠드라트 아비올라는 언젠가 닥쳐올지 모를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자신이 죽고나면 딸 하프사트 아비올라가 내 일을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프사트에게도 어느 날 말했다고 한다.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면, 너는 이 엄마가 굉장히 자랑스러울 것이라고. 이 말을 듣고 하프사트는 우린(자식들은) 항상 엄마가 자랑스러웠다고 답했다고 한다.

 

쿠드라트의 자식들은 엄마 쿠드라트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가슴에 새기고 살지만, 모두가 그 유산을 이어 받은 하프사트의 민주화 운동에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쿠드라트의 아들은 누나 하프사트의 정치 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부통령까지는 몰라도 대통령은 될 수 없다는 식의 폄훼를 하며,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남성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이 정치를 하도록 맡겨두라고 한다. 이슬람교에서 여성은 침대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면서. “너희는 늘 기도만 해라.” 익숙한 말이다. 너희(여성)는 말하지 마라. 너희는 나서지 마라. 여자가 감히 어디 등등 열거하기 벅차다. 나이지리아가 되었든 한국이 되었든, 가부장제의 명령은 오래된 전통처럼 세계 곳곳에 아직 울려퍼지고 있다.

 

쿠디라트와 하프사트 모녀의 힘을 빌어 지속되는 나이지리아의 민주화 운동. 아름다운 그녀들 만큼이나 나이지리아의 민주화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기존의 가부장적 지향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적 지향을 창조해가는 하프사트에 의해, 이미 그 결실의 씨앗들은 뿌려지고 있기에.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오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