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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배구단] 노년에는 성장할 수 없다는 편견

한국여성의전화 2014. 9. 27. 01:21

노년에는 성장할 수 없다는 편견

다큐멘터리 <할머니 배구단> -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할머니 배구단> 스틸컷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뒤로, 한 여인이 달력의 마지막 장을 뜯어낸다. 그녀는 지난해는 버리겠다며, 뜯어낸 달력을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나지막이 창밖을 바라보며 ‘다음 해에는 무슨 일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고 말한다. 이 장면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일까. 보다 구체적으로 이 장면 속 여인의 나이는 몇일까. 많은 대답이 나오겠지만 98이라는 숫자는 잘 나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는 사실이다. 영화 ‘할머니 배구단’ 속 한 장면인 이 컷의 주인공은, 배구단의 최고령자 아흔여덟 살 ‘고로’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영화로서 <할머니 배구단>

 

영화 ‘할머니 배구단’은 제목 그대로 할머니로 이루어진 배구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이 주인공이니 만큼 일반적인 스포츠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광경이 영화에서 펼쳐진다. 우선 할머니 배구단의 배구는 격렬한 스포츠보다는 유희에 가깝다. 할머니들은 배구를 잘 하는 것 보다는 배구를 한다는 것 자체에서 더 큰 즐거움을 찾는 것 같다. 으레 스포츠 영화하면 나올 법한 구성원들 간의 경쟁이나 충돌도 없다. 경기가 별로거나 누군가 공을 주먹으로 치는 반칙(?)을 해도 배구단 내에선 여유와 웃음이 가득할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 흥미로운 부분은 기존 스포츠 영화와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 아니라 유사성을 가지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스포츠 영화는 주인공이 훈련을 통해 실력 향상을 이루고 목표로 한 대회에서 성과를 내며, 이 과정에서 인물의 성격이 변화하는 이야기구조를 가진다. 즉,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는 성장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할머니 배구단은 스웨덴 팀과의 경기를 앞두고, 전문 코치를 고용해 훈련을 받으며 실력 향상을 이룬다. 이들은 경기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 이 와중에 부상을 겪기도 하며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원정 경기를 마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캐릭터는 50년 가까이 살던 집에서 이사를 하고 중간에 부상도 겪은 리르모르일 것이다. 앉을 의자도, 사용할 스토브도 불편한 새 집을 두고 그녀는 이 나이에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하냐며 한탄한다. 하지만 새로 배구를 배우고, 새 유니폼을 입고, 원정 경기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동안 그녀의 태도 또한 바뀐다. 그녀는 새로운 집을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조금씩 고치며, 그 집에 적응해나간다. 즉 스포츠를 매개로 그녀는 성장을 한 셈이다.

 

노년에도 우리는 실패하고 성장한다

 

얼마 전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그램에서 윤여정이 한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녀는 본인도 67살을 처음 살아보는 거라며, 그래서 삶은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노년은 삶의 완성이고, 이제 마침표를 찍을 시간만 기다리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윤여정의 말은, 누구나 20대, 30대가 처음이듯 노인도 노년이 처음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처음 겪는 노년에 나이든 사람들도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시행착오와 실수는 우리가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여지를, 다시 말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결코 노년은 ‘그 다음’이 없는 시기가 아닌 것이다. 영화는 단지 배구를 하며 노년을 즐기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아니라, 도전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그 와중에 스포츠에서도 개인의 삶에서도 성장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말하자면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보이던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의 이야기구조를 따르며 노년에 대한 관념을 완벽하게 뒤집어 버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노년의 삶에도 그 다음이 있음을, 노년에도 성장할 수 있음을, 아흔여덟 살인 사람도 달력을 떼어내며 그 다음해를 기대할 수 있음을 잘 상상해내지 못할 것이다. 할머니 배구단은 그런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픈 영화다. 영화는 가장 유쾌한 방식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신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