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뷰어

[페미니스트에게 듣다] ‘페미니스트’가 가능한 조건을 위하여

한국여성의전화 2014. 10. 1. 23:38

 

‘페미니스트’가 가능한 조건을 위하여

다큐멘터리 <페미니스트에게 듣다> -

 

 

얼마 전 배우 엠마 왓슨의 고백(?)이 큰 화제를 모았다. 이 고백은 다름 아닌, 그녀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이다. 엠마 왓슨은 유엔에서 양성평등 캠페인에 대한 연설을 하며 이런 고백을 감행하였다. 사실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숨겨야 할 비밀이어선 안 된다. 누군가가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고, 그 사람을 주저하게 만드는 압력이 존재한다면 그런 세상은 제대로 된 세상일 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엠마 왓슨의 이 고백 아닌 고백 이후로, 지금의 세계가 결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좋은 곳이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왓슨의 연설 후로, 그녀의 누드 사진을 공개하겠다는 웹사이트가 개설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마초적인 조롱 글들이 인터넷을 가득 매웠다. 물론 누드 사진 이야기는 해프닝에 그쳤지만, 그 ‘해프닝’을 통해 누군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지칭할 때 얼마나 살 떨리는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 정도면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말로 비난을 산 케이티 페리가 이해될 정도다.

 

숨죽인 목소리로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


그런데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두려워하는 것은 엠마 왓슨 사태를 바라 본 사람들만이 아닌가보다. 영화 <페미니스트에게 듣다>의 감독 제니퍼 리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 날, 그녀의 직장 동료 중 한 사람이 그녀에게 와서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페미니스트냐고.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직장 동료가 굉장히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어린 아이에게 속삭이듯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 들을까봐 두려운 듯이. 이러한 분위기의 결과인지 영화의 초반에는 더 이상 페미니즘이 필요없다는 젊은 세대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이 젊은 세대에는 가장 페미니즘을 필요로 할 법한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여성들은 말한다. 여성이 억압받던 것은 전 세대의 이야기이고, 그 세대들 덕에 우리는 성차별이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으니 더 이상 페미니즘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의아했다. 물론 완벽한 수준도 아니고 상대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역사상 가장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웁니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저는 자유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 보장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와 같은 자유 박탈의 상태에서 벗어났으니, 여러분들이 ‘자유주의자’이거나 ‘민주주의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아무도 말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성의 삶이 아무리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아졌다고 해도 왜 누군가가 페미니스트여선 안 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여성의 삶이 나아지고 말고와 무관한 문제이지 않을까. 그것은 단지 지금 이 사회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말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사회라서 생긴 문제이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페미니즘은 더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생각했다. 만일 지금 교과서가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필요했으며, 민주제도는 어떤 희생과 운동을 통해 성립했으며, 왜 아직도 민주주의가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페미니즘의 연원과 발전 과정, 필요성을 설명한다면 사람들이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지 않을까 하고. 아니나 다를까, ‘더 이상 페미니즘은 필요 없어요’라는 질문에 직면한 영화는 정확히 그 과정을 따른다. 지난 페미니스트 선배들을 찾아 역사를 듣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실로 페미니즘 버전 어벤저스라 할 만큼 걸출한 페미니스트 들이 등장한다. 베티 프리단부터 프란시스 엠 빌, 케이트 밀렛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그리고 수잔 브라운 밀러까지. 이들은 미국 여성운동, 제 2의 물결이 태동한 계기부터 전미여성기구(NOW)가 출범한 상황, 그리고 그 이후의 급진적인 물결까지의 역사에 대한 증언을 내놓는다. 이들의 말은, 다소간의 비약을 포함하자면 페미니즘의 교과서와 같은 기능을 한다. 계기, 역사, 필요성을 말함으로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교과서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해서 ‘교과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은 이 영화는 북미 페미니즘 운동 중 제한된 부분을 다루며(NOW 내에서 크게 이야기 되었던 ‘자주색 위험’ 이슈가 전면에 부각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이것이 페미니즘의 ‘총체적인’ 역사는 아니라는 점이다.(사실 페미니즘은 ‘총체성’ 자체를 거부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영화를 활용해보고 싶다. 이 영화는, 교과서는 아니지만 ‘교과서적인 수사’를 활용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수사는 정확히,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토대를 페미니스트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거리낌 없이, 나도 ‘페미니스트입니다’라도 말할 조건을.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여성주의자들 역사의 총론을. 그것이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울 지라도. 우리는 여성주의자들이 뛰쳐나와 놀 수 있는 땅을 만들어야만 한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신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