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뷰어

[가볍게, 더 높이] 진흙 속에서 꽃 피운 소녀의 이야기

한국여성의전화 2014. 10. 13. 12:53

 

진흙 속에서 꽃 피운 소녀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가볍게, 더 높이> -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있으며, 형제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서로 간에 행동해야 한다.” 66년 전, 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총회에서 58개국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의 제 1조이다. 오래 전, 우리는 각자 다른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도 당연하고 보편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 내용은 방대하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 세계적으로 당연한 이 사실에, 당연하다는 듯 어기고 있는 국가, 인도. 인도인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진다. 카스트 제도 하에서 인도는 그들만의 법이 존재한다. 제 1조의 내용은 아마 이럴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카스트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계급에 따라 차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있으나, 엄격한 계급제도에 입각해서 서로 간에 행동해야 한다.”

 

만지지도 말라, 천하니까

 

놀랍게도, 카스트제도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접촉할 수 없는 천민이라는 뜻의 ‘불가촉 천민’인 달리트(Dalit)가 그렇다. 달리트 이름의 뜻은 ‘억압받는 자’, ‘파괴된 자’, ‘억눌린 자’ 라고 한다. 인도 인구의 약 16%가 달리트 계급에 속하고,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안고 살아간다. 하필, 많고 많은 나라 중 인도에, 그것도 카스트제도에도 속하지 않는 달리트 계급에, 심지어 여성으로 태어난 ‘뚤라시’가 다큐멘터리 영화 <가볍게, 더 높이>의 주인공이다.  짐작할 수 있듯, 그녀의 삶은 평탄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에 그녀는 자신이 달릿 계급임을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꿈을 꿔요” 라는 말과 함께.

 

복싱이 미래를 바꿀 거라 믿는다

 

뚤라시의 꿈은 복싱 선수가 되는 것이다. 24년의 인생 중 10년간 복싱을 해왔다. 달리트 계급이기 때문에, 선수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것들이 많다. 1단계, 25살 전에 대회에서 우승을 해야 한다. 2단계, 총장의 사인을 받아야 한다. 3단계, 정부프로그램 자격을 얻어야 한다. 엄청난 노력 끝에 얻을 수 있는 것이 국제대회 선수도 아니고, 직업도 아닌, 고작 정부프로그램 ‘자격’ 이다. 어깨 탈골 부상도 이겨내고, 대회 출전을 위해 요구한 돈도 감수하면서도 그녀는 “복싱이 미래를 바꿀거라 믿는다”고 말한다.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그녀의 꿈을 향해 앞으로 돌진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속에 맞춰 살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운명은 바꿀 수 없으나, 미래는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복싱이다.

 

“내가 권투를 떠나더라도, 권투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진흙 속에서 발버둥치며 복싱을 통해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굴레 속에 있었다. 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그에 합당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연습해온 복싱 클럽의 코치가 같이 자자고 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 그녀는 성공에 굶주려 했지만, 자기 자신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돈, 성공, 직업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존엄성보다 다른 소녀들에 대한 존엄성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다른 소녀들이 자기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코치인 카루나를 고소한다. 자신의 복싱 인생을 잃더라도 다른 소녀들을 지켜야 한다고 결심한 까닭이다. 소송을 취하하면 엄청난 돈을 준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권투를 내려놓고 그녀가 얻고자 한 것은 ‘인권.’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권투를 떠났으나 권투는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소송 중 뚤라시가 언론에 알려지고 그 능력을 알아본 국제 코치가 개인트레이너로 일하도록 제안한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것이 내 인생이야. 나는 이 삶이 좋아. 나는 자유로운 새야. (This is my life. I like this life. I’m a free bird.)” 80분간의 러닝타임 중 가장 밝은 얼굴을 띄며 말이다.

 

진흙 속에서 꽃 피우다  

 

그녀의 이야기는 “여성 인권의 현주소를 조명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시오” 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25년 인생은, 여성 인권이 존중 받지 못한 문제들 투성이다. 폭력, 성폭력, 가부장제, 고용불평등,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라는 인식 차별 등. 놀랍게도 이 문제들은 ‘세계인권선언’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듯 보이는 전세계 어디에나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다. 과연 우리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는 인도를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본다. 뚤라시의 인생은, 여성 인권은 자기 자신의 인권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타인의 인권 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자기 자신의 인권을 지키는 것은 자기의 존엄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며 자기 삶에 대한 개척 정신을 잊지 않는 것이다. 진흙 속에 스스로 꽃이 되어 피었듯. 자신의 인권을 지키고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자 하는 뚤라시의 노력이 조용히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운명에 구속되지 않고 ‘그녀의 인생’을 위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위대하게.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이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