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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 소풍] 고인 물의 세계와 푸른 하늘의 교차로

한국여성의전화 2014. 10. 1. 22:36

 

고인 물의 세계와 푸른 하늘의 교차로

경쟁부문 <녹>, <소풍> -  

 

 

고인 물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

 

고여 있는 물은 시간이 멈춘 세계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채 그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서서히 썩어갈 뿐. 사라지지도 못하고 자신이 ‘고여’있음에 절망해야 하는, 발버둥조차 치기 버거운 그런 세계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바로 이런 고인 물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두 가족의 이야기이다.

 

녹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

 

<녹>은 네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보여준다. 귀를 닫고 입을 다물어버린 어머니, 가족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폭행을 동생에게 되풀이 하는 오빠와 집 대문의 녹을 떼어내는 소녀. 아빠, 엄마, 아들, 딸의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살고 있지만 이들은 마치 정해진 규율을 따르고, 질서를 지키며 매일을 ‘버티는’ 것처럼 보인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녹>

 

폭력과 억압, 숨을 옥죄이는 질서, 차별, 미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집. 그 속에서 소녀는 자신의 살을 갈라내고, 오빠에게 다시 폭력을 되갚는다. 그러나 이들의 잔혹한 관계는 깨지지 않는다. 팔에, 그리고 목에 흉을 남긴 채 다시 숨 막히는 질서를 지킬 뿐이다. 더 이상 울타리가 아닌 감옥이 되어버린 서로의 존재. 이들의 관계는 벗겨지지 않는, 영원히 남아있는 녹과 같다.
손택수 시인의 「녹슨 도끼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소녀는 매일 대문의 녹을 뜯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녹을 안고 있는 소녀가 녹을 벗겨낼 수 있을까. 가족들을 잠식한 녹을 벗겨내고, 감옥이 아닌 울타리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구정물 밖으로 나온 그녀들의 여정

 

<소풍>은 꽤나 민주와 할머니. 세대가 다른 두 명의 여자로만 이루어진, 꽤나 단촐한 가족 구성원을 보여준다.
스킨과 로션이 전부인 화장대. 민주가 할 수 있는 ‘화장’은 고작 립스틱을 바르는 것 뿐이다. 곰팡이가 피어오른 좁은 집, 늙은 할머니, 구식 핸드폰, 때가 잔뜩 낀 운동화. 민주가 가진 것들은 전부 가난한 그녀를 더 초라하게만 만드는 낡아빠진 것들 뿐이다. 막힌 수채구멍 위로 올라와 고여버린 구정물처럼, 그녀의 인생은 빈곤하고 비참하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소풍>

 

일하러 가기 급급한 그녀를 붙잡는 할머니. 할 수 있는 일은 현관에 쳐진 발을 막대로 건드는 것 뿐, 민주가 없으면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는 그녀는 물 먹은 솜처럼 늘어져있을 뿐이다.
해고된 이후, 스스로 숨을 막는 민주의 팔을 어루만지며, 민주의 입에 립스틱을 칠해주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민주. 서로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던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길을 나선다. 물 위를 뚫고 올라와, 눈부신 하늘 밑에서 맞잡은 손을 흔들며. 
그녀들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가는 길이 행복한 ‘소풍’길임은 확실하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서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