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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가정폭력을 넘어서기 위해서

한국여성의전화 2014. 10. 17. 12:32

 

가정폭력을 넘어서기 위해서

 다큐멘터리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가정폭력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집안일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 탓이 아니에요.”

당신은 소중한 존재니까요. 아무도 함부로 말 못하게 해요.”

 

가정폭력이란 말을 들으면 여성학 수업에서 들은 한 사례가 생각난다. 아내의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게 남편이 집안일이라고 둘러대며 경찰을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다. 90년대의 일이었고, 지금은 그렇게 무마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가정폭력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집안일이다.

 

영화는 가정폭력의 경험이 있는 변호인이자 강사인 킷이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여성들을 위해 활동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한 사례로, 디에나는 딸과 함께 남편에게 납치당해 나흘 동안 트럭에서 폭행을 당했다. 증거 사진을 보면 특수 분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는 엉망인 모습인데 지방 법원에서는 원하는 만큼의 형기를 받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경찰에게 발각 되었을 때 디에나가 남편의 폭행을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은 아무런 조치 없이 집으로 귀가했다.

 

디에나의 피해가 법이 요구하는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기에 지방 법원에서는 남편에게 적은 형량을 줄 수밖에 없고, 거주지와 둘이 발견된 지역이 다르고 폭행이 이루어진 장소가 불확실해 경찰은 남편을 구금할 수 없었다. 이러한 법의 맹점이 피해자를 힘들게 만든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격리를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피해자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음을 뜻한다. 피해자는 경찰에게로 넘어가면, 법원에 가면 상대가 처벌을 받고 자신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피해자는 전략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피해를 당한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어영부영 하다가는 가해자는 가벼운 처벌만 받고 만다. 서러움을 토할 새도 없이 변호사를 만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남자친구에게 맞아 한 쪽 눈이 실명된 상황에서도  

 

라티나는 남자친구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하다가 남자친구를 살해하게 된다. 라티나는 폭력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폭력마저 당연하게 생각했고, 때문에 남자친구에게 맞아 한 쪽 눈이 실명된 상황에서도 자신은 남자친구를 사랑한다고 했다.

 

라티나가 그러했듯, 가해자를 살해하고 감옥에 수감 중인 피해여성 중 대다수가 감옥을 더 안전하게 느낀다고 한다. 누구에게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안전한 장소가 된다. 사회가 해주지 않던 보호를 감옥이 해주기 때문이다. 감옥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지만 가정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집에서는 폭력이 발생한다. 피해자에게 이건 변하지 않은 사실이다. 매일이 폭력인 사람은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폭력을 제외하고 사고할 수 없다. 탈출의 끝이 지금까지의 폭력보다 더한 것일 수 있다면 용기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 몰래 도망치다가 문지기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불쑥 용기가 생긴다. 문지기를 없애면 도망칠 수 있구나. 문지기를 없애자. 피해자에게 탈출이 유일한 희망이었다면 문 밖의 세상이 자유인지 평화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집이 넓으니 같이 사십시오"

 

영화에는 가정폭력을 휘두른 남편이 유명한 의사라서 판사가 집이 넓다는 이유로 둘이 살 수 있다며 돌려보낸 이야기도 나온다. 내가 여성학 수업에서 들은 사례의 남편도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이었다. 사회적 위신이 그의 말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영화에 중산층 사람들은 아내와 아이를 때리지 않는다는 교수의 메모도 나온다. 이러한 시선은 또 다른 폭력이다.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데도 가해자가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짓는다. 어째서 피해자의 말보다 가해자의 입지에 더 신경을 쓸까?

 

가해자가 그럴 만 하다면 문제의 화살은 피해자에게 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는 내가 잘못해서 내가 맞았구나’, ‘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가정폭력을 경험한 대다수의 여성 피해자들이 남편을 비범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남들과 똑같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피해 여성들은 폭력의 원인을 본인에게 돌리기도 한다. 반복되는 폭력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본인은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자꾸 자신에게 네가 잘못했으니까 이러는 거다.’라고 하니까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은 잘못한 사람이 되어있다. 그때부터 자존감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신체적 폭력을 넘어서 정신적 폭력까지 이루어진다. 학대 받는 일상이 시작되는데 이렇게 되면 라티나의 경우처럼 폭력이 대물림될 수 있다.

 

그 이후가 더 궁금하다

 

영화의 끝, 디에나는 폭력에서 살아남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영화는 디에나가 가정폭력에서 벗어나 새 출발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그 이후가 더 궁금했다.

 

폴레트 켈리의 시 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에는 제가 그를 떠나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어떻게 아이들을 돌보죠?/돈은 어떻게 하구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피해여성들이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다가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양육과 생계의 문제가 있다. 전업주부거나, 직업이 있었지만 현재는 주부라면 헤어지고 나서 당장 얻을 수 있는 일이라곤 대체로 생계형 일자리뿐이다. 폭력을 행하던 남편이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리라는 보장도 없는 상태와 아이를 키우기에 턱없이 모자란 벌이. 아이를 생각하면 자신을 희생하고 만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가정폭력, 그 중에서도 아내폭력의 경우 아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좋지 않다. 여전히 이혼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큰 낙인을 찍고, 정부가 여성의 경력단절과 일-가정 양립에 관한 정책을 펼칠 정도로 여성 일자리 문제는 가야할 길이 멀다. 가정폭력의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면 해결책이라도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나는 여성이 가정폭력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데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폭력이 사회가 노력한다고 예방될 일은 아니지만, 노력한다면 피해자에게 좋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가부장적인 남편의 폭력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게 되고, 가정폭력이 누구에게도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고, 피해자의 피해를 부정하지 않고, 가정을 벗어나 자립하는 일이 어려워지지 않은 다면 가정폭력은 본인이 탈출하기도 전에 구출될 수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제 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뷰어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