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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움뷰어] 노년의 레즈비언들에게 배우는 ‘빛나는 인생’을 사는 법

한국여성의전화 2019. 10. 5. 05:48

노년의 레즈비언들에게 배우는 ‘빛나는 인생’을 사는 법

- 13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빛나는 인생> -

의정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여성의 땅’을 일구다

“남자와 함께 했던 제 평생 동안 그들은 꼭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어요. 저는 저만의 공간도 없었고 제 힘을 찾는 방법도 몰랐어요.” 여자들이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해 ‘남자들의 세상’을 떠났다. 밴쿠버부터 LA까지, 1970년대 미국 서부해안 곳곳에 여성공동체가 생겨났다. 여자들만 모여 사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캘리포니아 윌리츠에 ‘여성의 땅’을 일군 사람들은 그곳을 '완전히 다른 세계', '근사한 꿈의 낙원'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땅을 함께 소유해 살며 그곳을 가부장제와 단절된 곳으로 만들고자 했다. 한때는 고립주의를 고수했던 적도 있지만, 40년 넘게 마을을 이뤄 살면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도 변화했다. 오롯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모습이다. 이 ‘여성의 땅’은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벨 수 없는 곳으로, 누구나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영화 <빛나는 인생> 스틸 컷

이 구역에 레즈비언은 나뿐인가 싶었는데

캘리포니아 오크몬트에 ‘무지개 여성들’이 있다. 레즈비언 모임 ‘무지개 여성들(Rainbow Women)'에는 결혼한 지 수십 년 된 부부가 여럿이다. 24년간 함께 살았다는 한 커플은 “결혼생활 30년이 넘는 부부가 많아 우린 애송이”라고 말하며 웃는다. 이들이 오크몬트에 처음 왔을 땐 레즈비언 친구가 없었다. 정체성을 지키며 안전하게 살기 위해 동지를 찾게 됐다. 알고 지내던 레즈비언 친구들을 이 마을로 불러들였다. 전 애인도 이사 온 건 '안 비밀'이다. "50년 전에 친구였는데 지금 친구로 남지 못 할 이유는 없죠." 가까이 모여 사는 레즈비언 친구들은 서로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비춰주는 따뜻한 빛이다.

행복한 레즈비언들의 노년 일상

‘무지개 여성들’의 존재는 오크몬트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아직 벽장 속에 있는 사람에게도 안도감을 준다. 그 모습을 보는 우리에게도 그렇다. 노년의 두 여성이 손을 잡고 해바라기 밭을 거니는 장면을 보고 생각했다. ‘동성애의 최후는 바로 이거지!’ 그동안 성소수자의 삶은 편견 가득한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외롭게 늙고 비참하게 된다’던 얘기들을 반박하는 장면들이 이 다큐멘터리에 가득하다. 서로를 닮은 얼굴로 나이 들어가는 레즈비언 커플들의 모습이 가슴을 뛰게 한다. 파트너와,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상은 평범하지만 그것이 주는 행복은 특별하다. 유쾌한 농담과 기분 좋은 웃음 소리를 듣고 있으면 덩달아 미소 짓게 된다.

 

함께 늙어가며 알게 된 삶의 가치

은퇴 후엔 뭘 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반려자가 죽은 뒤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노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면, ‘빛나는 인생’의 여자들이 하나의 답을 보여줄 것이다. 이들은 서로의 버팀목이다.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함께 버텨줄 친구들이 옆에 있다. “늙어가는 게 아름답다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깨달았다”며 노년의 행복을 말한다. 서로의 삶이 빛날 수 있도록 돕고, 그로 인해 각자 ‘빛나는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안다. 주변을 돌보며 활기차게 사는 이 여성들에게 나이드는 법을 배운다.

영화 <빛나는 인생> 스틸 컷

모든 사람이 포용되는 공동체를 꿈꾸다

공동체로부터의 환대와 지지를 경험한 여성들은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발레이오에 사는 브렌다는 모든 이가 포용되는 지역사회를 꿈꾸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윌리츠의 여성들도 그곳을 더 나은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계속 싸워왔다. 이들은 “의견 충돌이 있어야만 무언가 일어난다”며 격렬한 논쟁의 경험을 긍정한다. <빛나는 인생> 속 여성들은 함께 모여 살며 변화하게 됐고, 사회에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려고 나선다. 흩어져 있던 소수자들이 모여 세상의 중심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 멋진 일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윌리츠를 여성의 땅으로 만드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던 샐리는 ‘사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