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움톡톡

[피움톡톡] 이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질문해야 할 시간

한국여성의전화 2019. 10. 6. 18:11

이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질문해야 할 시간

-13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톡!! <최강레드!>-

 

하안지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최강레드!>는 경쾌한 리듬의 음악에,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미식축구팀의 이미지로 시작되는 영화다. 하지만 강렬한 이미지 속 군데군데 모자이크 처리가 되고 깨져 보이는 영상효과처럼, 오프닝은 이 활기찬 풍경 속에 수많은 뒤틀림과 의문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2012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스튜번빌에서 발생한 미성년자 강간사건의 진실을 추적해나가는 다큐멘터리로, 가해자의 가족들과 지역사회 방관자 때문에 은폐될 뻔한 이 사건이 피해자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연대와 노력으로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105일 토요일 밤, 13회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던 <최강레드!>가 두 번째 상영과 피움톡톡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가해자들과 방관자들이 그것은 강간까지는 아니다’, ‘피해자가 그 파티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사건의 본질을 부정할 때 객석에서는 서늘한 분노마저 느껴졌고, 기가 막힌 헛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후 진행된 피움톡톡에서도 이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가 이어졌다. ‘강간문화 돌파하기를 주제로 한 이번 대담의 진행에는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소장이, 게스트로는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참여하여 관객과 함께 서로의 질문과 대답이 되어주었다.

 

그들이 놀이처럼 쓰는 강간이라는 단어, 우리의 언어로 전복시키기

영화에서 가해자들은 경찰 앞에서 그것은 강간이 아니었다라고 입을 모아 주장하면서도, 막상 유출된 사건 영상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분명히 강간이라고 표현하고 그것이 즐거운 놀이인 것처럼 묘사한다. 오매 부소장은 그동안 많은 활동가가 강간 카르텔 철폐를 외치는 것과 같이 강간이라는 단어를 가시화, 구체화하며 그 심각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이와 같은 강간문화는 그 무게감을 훼손하며 가해자들의 유희와 흥분의 언어로 뺏어가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강간문화가 단지 특정한 개인의 일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또 은폐하려고 하는 공동체에 원인이 있다는 의견이 이어졌다. 최선혜 소장은 꾸준히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을 언급하며 성폭력 공론화는 공동체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 입장에서는 숨기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 사건을 잘 해결하고 드러내면 왜 치부가 되는가?’라고 지적했다.

 

가해자에게 더 많은 질문과 책임을, 피해자에게는 더 많은 연대를

관객과 진행자 모두 <최강레드!>에서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다른 미디어들에서 사건을 다뤘던 방식처럼 피해자의 진술만을 요구하지 않고 철저히 가해자와 방관자의 언행, 행동에 대한 증거로 사건을 설명했다는 점이었다. 가해자의 어설픈 거짓 진술이 결국 사실이 아님이 드러나고 그들이 저지른 폭력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질 때, 사건은 투명해지고 우리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명확히 보게 된다. 오매 부소장은 평소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질문들, 가령 네 말이 과연 진실인지’, ‘가해자를 처벌할 생각이 있는지등의 물음들이 너무나 윤리적인 것들,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들로 가득하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2차 가해를 멈추고 그 시간에 가해자들에게 더 많은 질문과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 사건에서 가해자들의 범죄사실을 증명하고, 고발하고, 알려지기까지에는 수많은 연대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가해자들의 가족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당하면서도 옳은 일을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범죄 블로거 알렉스 고디드와, 법원 앞으로 가면을 쓰고 뛰쳐나와 몇십 년 전의 강간 피해 사실을 용감히 고백하는 여성들이 있기에 묻힐 뻔한 진실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변화는 계속되고 희망은 있다

한 관객은 이에 대해 영화를 보고 강간문화가 만연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렸고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것을 어떻게 줄이거나 없앨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소감을 전했다. 실제로 이 사건에서 큰 역할을 한 범죄 블로거 알렉스 고더드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나 가해자들의 근황을 추적하는 포스트를 올렸는데, 한 가해자는 출소 후 멀쩡히 학교의 대표 선수로 활약하는 등 여전히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미미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오매 부소장은 우리가 바라는 모습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유의미한 변화의 단초들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피해자의 집에 찾아가 마이크를 들이밀던 기자들이 먼저 활동가에게 어떻게 취재하는 것이 윤리적일까요?’라는 질문을 하고, 성희롱이 난무하는 단톡방에서 용감하게 그것을 제보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들은 우연한 것들의 합이 아니라, 분명히 페미니스트들이 집회에서 소리 높여 외치고, 청원하고, 연대한 것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따뜻한 박수 소리로 <최강레드!>의 피움톡톡은 끝을 맺었다.